갑옷은 어떻게 관리하고 수리하였는가
- 소찰 갑옷의 구조와 일본인의 수수하고 성실한 기질이 맞아 싸움터에서 소유자 자신이 수리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 파손품이나 중고품의 재활용에도 적극적이었다.
활이나 총을 쏴서 강도를 확인 · 증명한다
- 옷으로 코팅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년 정기적인 거품 을 게을리하는 등 보관 상태가 나쁘 면 갑옷은 손상되고 만다.
- 특히 끈 부분 등은 이에 약했다.
- 비에 젖는 것도 좋지 않다.
- 서양의 갑옷보다는 쾌적하지만, 오도시게가 젖은 채로 낮은 기온 하에 있으면 갑옷이 얼어버려 괴로웠다고 한다.
- 참고로 파손된 경우에는 응급 수리가 가능하여, 사무라이나 병사들은 전장에 도구를 지참하고 갔다.
파손되거나 낡은 모델은 갑주 장인이 회수해서 재활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말로 '시카 에시(a)', 재활용품은 '시카에시모노라고 하였는데, 여러 개의 한 갑옷에서 볼 "만한 부품을 찾아 재생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갑옷마다 소찰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쓰쓰미라고 하여 소찰을 부드러운 짐승 가죽으로 감싸 융합 시킨 재생품을 적당히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제작 및 공정
- 제작 공정 중에는 갑옷의 강도를 확인하는 시험도 흔히 이루어졌다.
오요로이가 주류이던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를 '다메시요로이(t)'라 부르며, 후세다케노유미)라는 강력 한 복합궁을 쏘아 시험하였다. 이것이 16-17세기에는 화승총으로 도세이구소쿠를 쏘는 '다메시구소쿠(宗)'로 변화 한다. 난반구소쿠로의 철제도(R)를 향해 15걸음(17이라는 설도 있다. 떨어진 곳에서 쏘는 형식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비슷한 시험이 서양에서는 플레이트 아머에 대해 실시되었다. 일본에 서는 앞면과 좌우면을 향해 쏘았고, 뒷면에 대한 시험은 '무사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 유로 불필요하게 여겼다. 시험 사격한 증거로서 탄흔은 남겨두었다. 다메시쿠는 에도 시대에 들어설 무렵까지 이루어졌으나, 이후 갑주가 여유 있는 무 가의 사치품이 되고부터는 탄혼을 본뜬 깔끔한 함몰부를 넣게 된다.
기마무사가 사용한 일본의 활
- 사격전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헤이안 - 가마쿠라 시대의 활은 매우 커서 최대 길이 가 200cm나 되었다.
이는 기마무사가 운용하는 것을 전제한 할이므로, 보병의 활은 140~160cm였으리라 추측된다 구석이라면 유연한 나무로 만드는 목궁, 한층 강력한 것이 나무와 대나무를 겹쳐 붙인 복합궁 후세다케노유미(弓)이다. 산마이우치유미 는 나무를 대나무에 끼워 아교로 접착한 더욱 진화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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