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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통해 세상을 보다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한 오해와 진실

by 책과함께라면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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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서 이런 생각들 해 보셨나요?

 

왜 훈민정음은 1443년에 창제, 1446년에 반포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지?


왜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일까?

 

훈민정음을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봤고,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실은 뭘까?

 

최만리라는 사람은 한글 창제를 왜 그렇게 반대한거야?


훈민정음 창제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들어본 것 같은데 ‘언문‘은 무슨 의미일까?

 

 


 

훈민정음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의 의미는 무엇?

∎ 한글 창제에 대한 실록의 두 기사 


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세종실록(世宗實錄) 25년(1443) 12월조 끝부분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② 是月 訓民正音 – 세종실록(世宗實錄) 28년(1446) 9월조 끝부분
(이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실록의 두 기사에 대한 20세기 초 학자들의 해석

세종 25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완성되기는 했다. (일종의 베타버전)

∙ 용비어천가(1445년 편찬, 1447년 간행), 한글 가사 등에 사용해 보는 등의 실험과 수정/보완을 거쳐 세종 28년 9월에 최종 완성되었다고 이해했다.

∙ 한글날(본래는 ‘가갸날‘)을 정할 때도 ②를 중시하되 년월(年月)까지만 알고 일자(日字)를 모르기 때문에 9월 말일이라고 가정하여 양력으로 환산: 10월 29일

 

∎세종실록 28년(1446) 기사 중 ‘是月訓民正音成’의 의미

한글이라는 문자가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訓民正音』이라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 당시에는 임금의 명에 따라 어떤 책의 원고를 작성하면 임금에게 원고가 완성되었 다는 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 원고의 완성으로부터 책의 정식 출간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 원고를 바탕으로 활판을 짜거나 목판에 새겨서 인쇄
- 인쇄된 책들을 임금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다. → 반사(頒賜), 반포(頒布) ∙ 따라서 이 기사는 책 『訓民正音』 훈민정음의 반사/반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1930년대에 방종현 선생이 한글날 기념식에서 이러한 내용을 지적

∙ 홍기문(1947) 『정음발달사』에서도 같은 지적이 있었다.
∙ 김민수(북한의 어학자)도 ①의 기사를 중시하여 양력 1월을 한글날로 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한글날 제정을 둘러싼 우여곡절

 

∎ 『訓民正音』 해례본의 발견

∙ 오랫동안 실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訓民正音』 해례본이 1940년대에 발견되었다.

∙ 이태준 등의 주선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소장하게 됨.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 중)

∎ 『訓民正音』 해례본의 정인지(鄭麟趾) 서문

癸亥冬 我殿下 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 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正統十日年(1446년)九月上澣)

∙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히 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려 주신 聖人으로서 제도와 施政 업적이 百王을 초월하시며, 정음을 만드 신 것도 옛 것을 본뜨지 않고 자연에서 이룬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인위적인 사사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다.

 

∎ 정인지 서문을 접한 후 당시 주류 학자들의 행동

∙ 당시 주류 학자들은 방종현 등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②를 한글날 제정의 근거로 삼은 결정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았다.

- “실제 한글이 완성된 것은 세종 25년(1443) 12월이 맞으나, 공식적으로 반포하지 않고, 여러가지 시험 사용을 하다가 세종 28년(1446) 9월에 정식으로 반포했다.”고 주장.

∙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의 기록 시점이 1446년 9월 ‘상순‘으로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 한글날을 “10월 29일”에서 20일 앞당겨 10월 9일로 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10월 9일을 휴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 과연 이들의 주장은 맞는 것일까? 거짓말!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했다면 실록 등의 사료에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 또한 당시 한글을 공식적으로 반포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 세종실록 25년 12월조 말미의 기록과 『訓民正音』 정인지 서문의 기록을 참조하면 실제 한글의 창제(완성) 시기는 1443년 12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한글의 창제 및 반포와 관련된 진실

한글의 창제: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 이전

『訓民正音』 원고의 완성: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순)

흔히 알려진 ‘1446년의 반포’라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종이 한글 창제 사업을 은밀히 추진한 이유

1. 중화 사상에 젖어 있고, 한자/한문이 기득권 유지의 주요 수단이 되어 있었던 사대부들이 새로운 문자를 환영할 리 없었다.

2. 이런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한글 창제 사업을 추진하면 사업이 시작부터 벽에 부딪힐 것이 뻔히 예상되었을 것이다.

3. 불교와 관련한 일로 세종과 신하들 사이에 소모적인 신경전이 반복되고 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과 또 다른 소모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혼자 만들었을까?

∙ 한글 창제 당시의 사료들은 한결같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친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세종대왕 친제설의 증거들

∙ 세종실록 25년 12월조 말미의 기록
∙ 『訓民正音』(1446) 해례본 정인지 서문의 기록
∙ 『訓民正音』 어제 서문에서 세종 자신의 기록
∙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의 기록
∙ 최만리 등이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답변

∎ 세종대왕 친제설에 대한 회의론

∙ 많은 이들은 당시에 모든 업적을 임금에게 돌리는 관례가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

∙ 따라서 세종이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 들이 많다. (아마도 집현전 학자들이 도왔을 것이라고 추정)


∎ 세종대왕 친제설에 대한 회의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친제설에 대한 회의론자들이 가지는 전제는 잘못된 것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 세종의 많은 업적 중 ‘친제‘라는 표현을 쓴 것은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 임금이 직접 하지 않고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실록에서도 신하를 시켜서 했다 고 하지 임금이 친히 했다고 하는 일이 없다.
예) 박연, 장영실에 관한 기록

∙ 한글을 세종이 친제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신하들이 한글 창제 사업을 돕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

∙ 세종 25년 12월에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하기 전까지는 이 일이 은밀하게 추진되 었다.

- 증거: 최만리 상소문(1444년 2월 20일)

∙ 한글을 만드는 단계에서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했다면, 집현전의 책임자인 최만리 등이 알았을 것이고, 진작 반대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이 나온 시점은, 세종이 한글 창제 공표 직후 첫 사업으로서 『운회』 번역 사업을 시작하고 거기에 집현전 관리들을 동원하도록 지시한 세종 26 년(1444) 2월 16일 직후이다.

∙ 최만리는 자기 부하직원들이 한글 관련 사업에 동원되자,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상소의 총대를 메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韻會』(운회) 번역 사업이란? 

 

∎ 세종실록 26년(1444) 2월 16일조의 기록: 『운회』 번역 사업 실시

命集賢殿校理崔恒 副校理朴彭年 副修撰申叔舟 李善老 李塏 敦寧府注簿姜希顔 等 詣議事廳 以諺文譯韻會 東宮與晉陽大君王柔安平大君瑢 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

∙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유(瑈), 안평대군 용(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을 임금께 여쭈어 결정하였다. (이 일에 대한 공을 치하하여) 상을 거듭 내려주고 供億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 운회 번역 사업의 성격

∙ 세종이 한글을 만든 주된 목적은 “백성의 문자생활의 편의 도모”이다.
∙ 부차적으로 세종은 한글을 발음기호처럼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세종은 중국어(특히 음운)에 조예가 깊었다.
∙ 『洪武正韻(홍무정운)』 등을 통해 각 한자의 중국 原音을 고찰해 보니, 당시 조선의 한자음은 원음(原音)으로부터 너무나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세종은 조선 한자음을 중국 원음(原音)에 가깝게 개혁하고 싶어했다.
∙ 漢字마다 한글로 발음을 적어서(한글을 발음기호로 이용하는 셈) 발음사전을 간행하여 보급하면 이 개혁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중에 『東國正韻』(동국정운)(1448)의 간행으로 실현됨.
∙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성공하기도 극히 어려운 일.
∙ 결국 동국정운식 한자음 개혁 시도는 실패함. 15세기 말부터는 현실 한자음 수용.

 

세종은 한글을 혼자 만들었을까?

∎ 왕자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음을 시사하는 증거

 

1. 『운회』” 번역 사업을 지시할 때, 왕자들이 감독하게 한 것

 

2. 신숙주, ≪洪武正韻譯訓≫(1455, 단종 3) 序 의 기록

文宗恭順大王 自在東邸 以聖輔聖 參定聲韻 (문종 공순대왕께서는 동궁 때부터 聲明으로 聖人을 보필하여 聲韻을 정하는 데 참여하셨으며)

3. 성삼문, ≪直解童子習≫ 序 의 기록

我世宗文宗 慨然念於此 旣作訓民正音 天下之聲 始無不可書矣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를 딱하게 생각하시어 이에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모든 소리가 비로소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없게 되었다.)

 

∎ 그렇다면 왕자들의 역할은 어느 정도 였을까?

∙ 한글은 거의 세종 혼자 힘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 한글 창제에 대한 핵심은 세종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 다만 세종이 한글 창제 작업을 하는 중간중간에, 자기가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그 기쁨을 함께할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신하는 믿을 수 없고, 믿을 건 아들들밖에 없었을 것

- 문종과 수양대군도 평생 지속적으로 한글에 대한 애착을 보임.

∎ 한글을 만들 만한 능력을 지닌 당시의 적임자는 세종임을 보여주는 증거

∙ 한글은 당시의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정밀하게 분석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 한글을 만든 사람은 음운학에 조예가 깊은 대학자였을 것이다.
∙ 당시에 음운학에 가장 조예가 깊은 학자는 바로 세종이었다.

- 신숙주의 증언: “홍무정운역훈” 서문
- 최만리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답변 중 음운학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 부분

 

한글 창제의 주체에 대한 진실  -> 세종이 한글 창제의 주체가 되어 거의 혼자 힘으로 한글을 창제했다


한글 창제 공표 이후의 혼란: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

∎ 최만리 등의 한글 반대 상소문 (1444년 2월 20일)

∙ ① 漢字의 구성 원리와 어긋나는 表音文字인 언문을 창제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事大 원칙에 어긋난다.

∙ ② 중국 주변의 오랑캐인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처럼 자체적인 문자를 만 드는 것은 中華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으로서 옳지 않다.

∙ ③ 신라 때부터 이두를 써 오면서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며, 이두는 한문에서 나온 것이라 관원들이 이두를 학습하는 것이 학문 진흥에 도움이 되었는데, 언문은 그렇지 않아서 언문만 배워도 관리가 될 수 있다면 다들 한문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될 것이고 성리학 등의 학문 연구는 쇠퇴할 것이다.

∙ ④ 이두로는 刑政에 있어 백성들의 불편이 많아 언문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것은 行刑者의 자질에 달린 문제이지 문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 ⑤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公論을 모으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구나 韻書에 언문으로 근거 없는 漢字音을 달아서 공포하려 는 것도 잘못이다.

∙ ⑥ 한창 聖學(성리학) 연구에 몰두해야 할 東宮이 무익한 언문 연구에 정신을 쏟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 ⑦ 임금께서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것은 옳지 않다

∎ 최만리의 상소문이 이 시점에 나온 이유

∙ 세종 25년(1443) 12월까지는, 또는 세종 26년(1444) 2월까지는 한글 창제 작업이 은밀하게 추진되어서, 신하들이 이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 또는 정보 수집에 능한 일부 신하는 알아차렸을 수 있으나,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거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고려하여 한글 창제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기는 하였으나, 문자를 만들어 놓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는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 한글을 사용하는 최초의 사업이 『韻會(운회)』 번역(한자에 한글로 음을 다는 작업) 이다. (세종 26년 2월 16일)

∙ 집현전이 사실상 책임자(부제학)인 최만리를 제쳐두고, 집현전 하급관리들을 직접 동원한 것은 비상식적인 일. 최만리에게는 모욕적인 일.

- 한글 창제에 비우호적인 신하들은 최만리에게 “당신이 앞장서서 반대하라!”고 최만리의 등을 떠밀었을 것.

∎ 최만리의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반응

∙ ① 또 이두를 만든 본 뜻이 곧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便民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언문도 또한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薛聰은 옳게 여기면서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 ② 또 그대들이 韻書를 아느냐? 四聲과 七音을 알며 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 ③ 상소문에 말하기를 “하나의 새롭고 신기한 재주”라고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소일거리가 없어서 책을 벗삼고 있는 것이지,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 ④ 또 내가 늙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세자가 도맡아서 하고 있고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참여해서 결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언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 및 증거

∎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

∙ 어제 서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백성의 편의
도모였다고 할 수 있다

 


 

∎ 훈민정음과 관련한 용어를 둘러싼 문제

∙ 세종 당시에는 한글을 ‘訓民正音’이라고 불렀다. → 공식적인 명칭
∙ ‘훈민정음’을 줄여서 ‘정음(정음)‘이라고도 했다.
∙ 세종이 한글 창제 직후 이와 관련한 사업 실시를 위해 기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구의 명칭은 ‘정음청(正音廳)’이었을 것이다.
∙ 세종실록 편찬의 주역(=엘리트 계급)은 한글에 비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 따라서 세종실록에서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지칭했다.
∙ 당시 ‘언문‘은 보통명사로서 ‘vernacular script’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즉 ‘언문’은 문명의 중심부에서 사용하는 글자(한자)와 대비하여, 어느 주변부 지역
(시골, 지방)에서 쓰는 문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핵심 내용 정리!

 

1. 한글은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

 

2. 한글이  만들어진 시점은 세종 25년(1443년) 12월(양력 1444년 1월) 이전이다

 

3. 한글은 공식적으로 반포되지 않았다.

∙ 세종 28년 9월조의 기사는 한글 창제 기사도 한글 반포 기사도 아니다.
- 是月 訓民正音成: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의미
∙ 이 기사를 한글 창제 기사로 오해하여 한글날을 정한 것은 실수였다.

4.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백성의 편의 도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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