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들은 왜 투구에 집착하였는가
- 서양 투구에도 드물게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것이 있다.
- 하지만 일본만큼 투구에 고집을 보이며 다종다양한 투구를 남긴 나라는 세계에 유례가 없다.
현실적인 이유와 죽음에 대한 로망
- 전국 시대의 무사는 특히 투구에 집착하였다.
- 투구는 애초에 무사라는 신분을 증명하는 전장의 필수품이다.
- 시계에서 투구는 예외로 치고 일정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만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당시에는 가와리카부토라는 기발한 디자인과 화려한 마에다테가 유행하였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눈에 띄기 위해서였다. 집단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전장에서의 공적에 상 용하는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동료와 상사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해야 했다.
등에 깃발을 꽂는 등의 방법도 있지만, 전장에서는 투구로 개인을 판별하는 것이 가장 빨랐다. 적의 모 을 쳐서 가져가는 경우에도 '투구를 쓴 머리'라면 커다란 공적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논공 행사시의 구비에서 적의 수급을 놓고 신원을 관장하던 일본인 확인을 위해 투구는 필요했다.
위용 넘치는 투구에는 자신과 동료의 사기를 고양하는 효과도 있다.
투구뿐만 아니라 특이한 갑옷이나 화려한 갑옷을 입는 것도 같은 동기에서였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이후에는 무가 문화가 개화하여, 미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투구도 등장한다. 눈에 띄기 위해서라는 얕은 동기만이 아니라, 전장에서 깨끗한 최후를 맞는 것 을 미덕으로 여기며, 자신을 죽이는 적에 대한 예의로서 미려한 갑주를 걸친다는 마음가짐 '이다. 이처럼 독특한 감각은 일본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눈에 띄는 갑주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은밀한 임무다 생존을 위해 눈에 띄지 않는 장비로 싸우는 무사도 있었다. 눈에 띄면 활이나 총으로 저격당할 위 힘이 크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합리적이다. 이를테면 옛날 단노우라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다만이 이야기는 진위를 알 수 없다.
투구 교환
- 투구는 무사에게 깊은 의미를 갖는 도구였다.
- 그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도 존재한다.
- 예를 들어 무사는 전우와 투구를 교환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경우가 있었다.
- 그 렇게 하면 난전 속에서도 서로를 놓치지 않고 지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변하여 우호의 증표로서 투구 교환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구로다 나가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화해의 증표로서 투구를 교환하다 일찍이 사이좋던 두 사 람은 조선 침략 때 함께 싸웠으나, 서로 충돌하면서 사이가 나빠진다. 하지만 귀국 후에 옛 친구를 떠올리고 서로에게 투구를 보낸다 이때 구로다가 '다이스이규와키다테모모 나리카부토(大水生脇立桃形兜)'를, 후쿠시마는 '이치노타니나라카부토'를 보냈다
가모우지사토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무장인데, 그는 진중에서 부하들에게 '이 중의 누군가라고 생각하는 데 은빛 메기 모양 투구(가늘고 긴 에보시형 투구)를 쓴 무사가 늘 최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그놈에게 뒤처지지 마라라고 독려했다. 그런 데 사실 그 은빛 메기 투구를 쓴 무사란 우지사토 자신이었다. 참고로 그는 엔비나리카부토(제비 꼬리 모양 투구)와 검정 일색의 마왕 같은 무시무시한 구소쿠를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족이지만 검은 갑옷이라고 하면 다테가가 유명한데, 마사무네의 갑주가 바로 다스 베이더의 모델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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