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화면(Broken screen) - 선정일
아침이 찾아오면 항상 하는 것들이 있다. 왼쪽 눈을 만져보는 것과 핸드폰을 켜 뉴스 기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왼쪽 눈에 이질감이 느껴져 눈물이 날 때까지 눈을 문지르는 것은 고칠 수 없는 습관이다. 아직 채 이물감이 사라지지 않아 비비대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뉴스의 핫라인을 훑으며 코스피 지수는 얼마였는지, 정치인의 잘못된 언행은 무엇이었으며, 죽은 사람은 어떤 일로 몇 명이나 발생한 것인지 살펴본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 몇몇 사건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의미 없이 반복하는 운동의 루틴과 같을 뿐이었고, 이 일들을 마치면 나갈 채비를 하며 또 다른 커다란 루틴을 반복할 준비를 했다.
출근길의 러시아워를 간신히 견뎌내고 일하는 식당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영업 준비를 마친 승환이가 나를 반겼다. 지난달에 함께 알바를 하게 된 승환이는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에 돈이라도 벌 겸 일을 시작했다. 성격이 좋아 오자마자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와는 천성이 다른 인간이었다. 싹싹하고 재치가 있어서 사장은 그를 좋아했고, 특히나 군 면제를 받지 않은 ‘사지와 정신’이 멀쩡하다는 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앞에서 언급하며 치켜 올리기 일쑤였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복무를 면제받은 나는 수 없이 이어지는 눈총과 멸시를 견뎌내며 몇 개월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일만 했었는데. 인생은 인내라 굳게 믿으며 출근길 러시아워와 그보다 더 전쟁 같은 직장에서의 시간도 버텨내었으나 요새는 그런 신념이 흐려지고 있었다. 창밖의 하늘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우울해지려 하고 있었다. 승환이 옆에 붙어 있는 지수가 보였다. 오늘따라 음식 냄새가 불쾌하게 코를 찔렀다.
이곳은 점심 때가 되면 비상이 걸린다. 일식집으로는 꽤나 유명해서 점심이 되면 밀물 때의 바닷물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아주 가끔씩은 정치인들과 대기업 임원들도 와서 시간을 보낸다. 아니 그렇다고 했다. 실제로 본 적은 있었지만 인지한 적은 없었고, 사장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일러주곤 하는 것이었다. 저 손님들이 이러이러한 사람들이니까 잘 봐 두고 다음부터 잘해라, 하면서.
일하면서 근처를 서성거리다 보면 들리는 건 전부 다 돈 이야기였다. 재개발이 유력한 곳이 어디고, 근처의 아파트들은 재건축이 확정이 나서 3억이 8억이 됐고. 계약서도 안 쓴 이름만 직원인 나의 처지와 이들과의 거리는 잠실 제2 롯데월드의 1층과 꼭대기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졌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의 인생들은 이번 주에 낼 월세 걱정에 제2 롯데월드가 무너져라 한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 현실의 삶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혼자 살기 시작한 지 6년째가 되었지만 번듯한 일자리 하나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다니며 사는 처지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재작년에 중소기업에 입사했지만 계약직으로 일만 죽어라 하다가 계약연장에 실패하고 잘렸다. 그 뒤로 알바란 알바는 다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였다. 나이가 차서 이제는 알바도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적성이나 위치 같은 것은 따질 처지도 못 되었다.
인생의 낙오자라는 느낌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정신을 부여잡기가 쉽지 않았다. 일하면서 종종 승환이와 마주치거나 그가 화두에 던져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냉기가 도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임의로 결정된 유전자와 환경 탓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또 남들에게도 말하고 싶었지만 회의감이 들었으며 남들은 타인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터였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었으니까. 최근에는 수저 계급론이 유행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결국 노력이 아니라 임의의 확률로 타고 나는 운의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는 열광하면서 살아 있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도 사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아닌 그저 남을 조롱할 때나 쓰이는 소재에 가까웠다.
생선 대신 차라리 내가 도마 위에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곤한 하루였다. 겨우 끝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면 또다시 전쟁을 방불케 하는 러시아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K-POP 음악소리들, 마치 축제라도 하는 양 서로를 치켜세우며 맥주를 들이붓고 있는 가게 안의 사람들. 멋들어지는 정장에 구두, 게다가 아직도 목에서 빼지 않은 사원증. 사실은 다 껍데기에 불과했다. 남들에게 과시하고 자신을 부풀리기 위한 것들. 사람들은 누구나 남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싶어 했다. 때로는 무리를 이루면서, 때로는 혼자서라도. 인간을 사회성의 동물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차별의 동물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껍데기야 가라 조용히 속삭여 봤지만 이것 또한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아침에 보다만 기사를 찾아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승환이 있었다. 가게에서 퇴근하면서 헤어진 지 불과 1시간도 안 되었지만 마치 반년 만에 만난 듯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저런 형식도 그가 깨우친 사회생활의 노하우일 터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말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키지는 않았으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가게 안에서의 영향력을 굳이 보이는 무언가로 치환한다면 나는 도로에 고여 있는 웅덩이 정도였고, 승환은 적어도 동네 수목원에 있는 연못 정도는 될 터였다. 굳이 삐딱하게 나온다고 만들 필요는 없었다. 웅덩이에게는 작은 조약돌 하나만 튀어도 난리가 나는 것이 순리다. 웅덩이로써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찾아간 호프의 알바 생이 귀여웠기에 후회는 안 되었다.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예쁜 것은 보기만 해도 좋으니까. 알바 생에게 슬쩍슬쩍 눈길을 던지다가 갑작스런 승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 일이 힘들었다나 뭐라나. 매일 같이 오던 진상이 오늘은 왜 안 왔냐고 했던가. 뭐 뻔한 말들. 자기한테 주어진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을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했다. 오늘 주방장의 상태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승환이 갑자기 진지하게 무언가를 물어왔다.
"쟤 번호 따볼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몇 번 말을 더듬었지만 얼떨결에 한번 해보라고 했다. 동시에 왠지 모를 패배감이 덮쳐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우리 테이블뿐만 아니라 다른 테이블의 남자들도 슬쩍슬쩍 알바생을 쳐다보는 게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의 눈빛이었다. 짐승들 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서도 승환은 여유가 넘쳤다. 결과를 말하자면 여유가 넘칠 만했다.
바깥풍경이 어두워지며 거리에 어둠이 짙어가자 술자리도 무르익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점점 더 날 것이 되어 갔다. 어쩌다 세계정세에서 섹스까지 넘어갔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대화 내용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다른 화제들로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나에게 운동을 하면 어떻겠냐고 말을 했다. 자기가 아는 체육관에서 같이 운동을 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술에 얼큰하게 취했어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비쩍 마른 내 몸에 관한 이야기였고, 걱정하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그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텐데, 술이 들어가서인지 조금 감정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포스기를 만지면서 계산을 하는 알바생 여자애가 보였다.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상, 적당히 마른 몸. 빅뱅이 백번 더 일어난다고 해도 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람에게 승환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번호를 땄다. 뒤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승환이가 타자라면 무조건 홈런이었고, 못해도 안타였다. 비루한 기분으로 좋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게 다 술을 마셔서 그런 것이었다.
더이상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우리는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카운터에서도 힐끗거리면서 승환을 보는 알바 생에게서 계산을 했다. 오늘 재밌었다는 말과 함께 뒤돌아서서 행인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를 보면서 괜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 근처에 다다라서는 길가의 전봇대를 붙잡고 먹은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이대로 내장까지 모두 입 밖으로 나와서 모두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시큼한 맛만 입안에서 감돌았다.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는데 구석에서 고양이가 눈을 번득거리면서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기에 바닥에서 음료수 캔을 집어 던졌다. 캔은 근처에도 닿지 못했으며 고양이는 여유롭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서 눈을 떠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다. 갈증을 느끼면서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받아보니 승환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잠결에 묻다가 어제 홧김에 운동 약속을 한 게 기억났다. 아무리 그래도 술 먹은 바로 다음날부터 운동하자는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친구끼리는 원래 이런 것이라며 이것저것 시키면서 끌고 다닌 녀석이 기억났다. 나이가 30이 가까워서도 삶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대충 세수와 양치만 하고 알려준 장소로 갔다.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서 도착한 곳은 주택가에 있는 헬스장이었는데, 승환이 다니는 곳이라고 했다.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가건물에 올라갔다. 꼭대기 층에 위치해서 올라가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건물이 낡아서 엘리베이터가 없어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낡은 건물에 비해서 헬스장은 입구부터가 깔끔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만큼이나 깨끗한 느낌의 실내에 생전 처음 보는 운동기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아는 것은 러닝머신이나 아령 정도일까. 이름도 모르는 기구들을 사람들은 오전부터 열심히 들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서 승환에게 전화를 거니 곧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가 체육관 저편에서부터 손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내게 등록부터 여러 가지 절차를 알려주었고, 나는 어느새 그 모든 절차를 끝마치고 헬스복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운동을 할 시점이 오자 승환은 자기 운동을 하러 갔다. 보통 같이 운동을 하자고 했으면 뭘 알려주든가 해야 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결국 구석에서 덤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틀어주는 노래가 신나서 마냥 심심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갑자기 카운터에서 등록을 받았던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붙였다.
“운동 안 해요?”
“뭐가 뭔지 잘 몰라서.”
말끝을 흐리기가 무섭게 그가 이야기했다.
“그래도 남자라면 직감적으로 할 수 있는 기구가 있을 텐데.”
나는 남자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도를 정확히 할 수 없었으나 난 ‘예, 뭐.’ 하면서 다시 말끝을 흐렸다. 사방에서 자기관리에 열심인 선남선녀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원님 잠깐만 이리로 와 보세요.”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머리를 민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키려고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이국적으로 생겼다고 할 수밖에. 그를 따라가니 거기에는 단두대같이 생긴 기구가 있었다. 누워서 목을 내밀면 위에 있는 바가 내려와 내 목을 댕강, 그런 느낌의 외형이었다. 따라갈 때까지만 해도 걱정을 했는데, 예상외로 그는 내게 운동을 알려준다고 했다. 추가 요금을 받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는데,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험악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아무것도 끼우지 않은 빈 봉으로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를 하는 법과 맨몸으로 하는 스쿼트를 배우자 그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했다. 웃는 게 뭔가 싸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운동을 끝내고 승환은 뭘 하고 있나 둘러봤지만 헬스장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찾는 것을 포기하고 부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샤워실로 가서 씻고 나왔다. 헬스장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라 이렇게 나올 수 있었지만 앞으로 일이 끝나고 와야 하는데, 과연 운동을 할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앉아 있을 때 서 있을 걱정 하지 말라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도대체가 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겨우 집으로 돌아가서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4달 정도 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몸이 점점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승환은 마주치는 일이 적었고, 마주쳤다고 해도 첫날과 마찬가지로 인사만 한 후에 자기 운동을 하러 갔기 때문에 각자 할 일들을 했다. 운동을 알려줬던 남자는 헬스장의 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그뿐이었다. 조상 중에 흑인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첫날 이후로 운동을 알려주지 않아서 또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럴 수 없었다. 독학이 답이었다. 그래서 유튜브나 각종 잡지를 통해서 운동을 공부했다. 처음 1달간은 알려준 운동만으로 충분했으나 몸에 변화가 생기면서부터 욕심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내 의지로 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실이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내겐 중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몸 정도는 스스로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점점 거기에 빠져들었다.
거울 앞에 섰다. 키가 자란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겨진 것도 아니었으나 몸에 근육이 붙어 전체적으로 커진 느낌이었다. 옷을 몇 벌 샀다. 전에 입던 옷들은 꽉 끼게 되었고, 무엇보다 태가 나지 않았다. 출근하려고 현관으로 가다가 갑자기 머리를 만져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에 샀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왁스의 뚜껑을 열었다. 앞머리를 올리고 드라이를 하면서 모양을 잡았다. 왁스를 사면서 동영상을 보면서 머리 모양 잡는 법을 공부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으나 못 생겨 보이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질감은 여전했으나 요즘 들어 눈을 만지는 일이 잦아들었으며 출근길의 러시아워도 생각보다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의식하고 나아가서는 즐기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액정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기 때문에 정차 벨을 누르고 출구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급정차해서 몸이 쓸려 옆자리에 있던 여자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순간 망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날 보고 예상치 못하게 심하게 예쁜 이목구비를 마주하게 되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여자도 날 올려다보더니 내 눈만 멀뚱거리면서 바라봤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지만 혐오감이 깃든 시선과 짜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 백 퍼센트였다. 그러나 들려온 말은 뜻밖이었다.
“괜찮으세요?”
미소를 지은 얼굴이었고, 조금은 수줍게도 들리는 말투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여자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중심을 잃어서…….”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버스의 문이 열리고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닫히는 버스의 문 사이로 여자의 미소 띤 얼굴이 까딱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묘하게 친절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기분 탓이라 여기며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게를 향해 걸었다.
날이 맑지는 않았다. 구름이 낀 것인지 스모그인지 하늘이 부옇게 흐려 보였다. 그 하늘을 보면서 아까 버스 안에서의 일을 되짚어 봤다. 분명 짜증을 낼 상황이었는데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그냥 여자가 남들보다 친절한 사람이겠지 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상가 건물을 지나쳐 가는데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름 신경 써서 꾸미고 나온 모습, 운동을 해서 그런지 옷 테도 잘 받는 것 같았다.
가게에 도착하자 사장과 몇몇 알바 생들이 도착해 있었다. 대충 인사를 하고는 바로 일을 했다. 냉장고에 술을 채워 넣었고, 빈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수저와 젓가락, 티슈를 확인했다. 이따금씩 뒤통수가 누군가의 시선으로 따가운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인 줄 알았으나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쳐서 고개를 돌렸다. 사장이었다.
“야 너 요새 운동 하나보다?”
“아, 네.”
“새끼 몸이 장난 아닌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대화 소리를 듣고 여자 알바 몇이 쪼르르 몰려 왔다.
“오빠, 동호 씨랑 뭐해요?”
“얘 몸 좋아지지 않았냐?”
여자애 하나가 갑자기 팔뚝을 만지기 시작했다.
“진짜, 와 근육 장난 아니다.”
다른 한명이 말을 이었다.
“몸만 좋아진 게 아니라 분위기도 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게, 이 새끼 진즉 이러고 다니지. 전에는 찐따 같이 입고 다니면서 군 면제 받았다고 얼굴에 붙이고 다니더니.”
“찐따라니 사장 오빠 말이 심하다.”
누군가의 악의 없는 관심을 마지막으로 받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났고, 그냥 지금의 상황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고,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흩어져서 자기 일을 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 또한 주방에서 청소용 에탄올을 가지고 와서 홀 바닥에 뿌리며 걸레질을 시작했다.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매일 같이 걷는 거리를 지나와서 늘 오는 가게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들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는 것 같은 까끌까끌함이 얼룩말 엉덩이의 감촉 정도로 바뀐 기분이려나. 하여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음이 왠지 가벼웠고, 당장이라도 사장 목을 조르면서 그만두겠다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지겨웠던 일이 조금은 수월한 느낌이었다. 시간도 조금은 빨리 가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액정에 비친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전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었으나 요즘에는 부쩍 그 빈도가 늘었다. 문득 운동을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헬스장에서 턱걸이를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도중에 그만두기 싫어서 팔이 저릴 때쯤까지 바에서 매달려 있다가 내려왔다. 예의 없이 누가 운동 중에 말을 거나 얼굴을 살펴보니 모피어스였다. 체육관 관장인 그는 늘 그렇듯이 묘하게 웃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맞자 갑자기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뭔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려나 했더니 그냥 평범하게 근황을 묻는 것이었다.
“요새 운동하는데 맛 들린 것 같네?”
“예 뭐 그렇죠.”
“몸이 확실히 전보다 좋아졌어.”
“처음에 알려주신 덕분이죠.”
“기본만 가르쳐준 건데 뭐.”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
“저야 뭐 아시다시피 맨날 운동하러 여기 오고, 일하는 날에는 일가고 똑같죠.”
“쯧쯧, 그렇게 몸 만들었으면 좀 나가 놀고 그래, 칙칙하게 집이랑 직장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같이 놀 사람이 있어야 어디 가든지 하죠.”
“찾으려 하면 사람이고 방법이고 다 찾게 돼 있어. 끌끌.”
늘 상 짓는 표정처럼 묘한 소리의 웃음이었다. 별로 길게 말할 생각이 없어서 이제 슬슬 돌아가서 운동이나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눈치를 보더니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요즘 정체기 오지 않았나?”
“예? 뭐요?”
“무게나 운동하는 거 다.”
“그렇기는 한데요. 그건 왜요?”
“나한테 좋은 게 있거든. 약인데 운동 전후로 한 알씩 먹는 거야.”
“그게 뭔데요.”
“무게도 늘고, 운동 능력도 늘어나게 해 주는 약인데, 혹시 관심 있어?”
약통을 꺼내 손에 들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외모 때문인지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내미는 빨간약 파란 약을 두고 네오가 고뇌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약은 한 종류뿐이었고, 그마저도 약통에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먹는다, 만다, 두 가지 선택지밖에는 없었다. 마치 네오가 된 듯 잠깐 고민을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구미가 당기는 주제는 아니었다.
“전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아요. 보디빌더 할 것도 아니고. 지금이면 만족해요.”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했다.
“그래? 그래도 한통은 공짜로 줄 테니까 한 번 써보고 괜찮다 싶으면 와서 이야기해.”
그러면서 내 손에 아스피린 통 같은 것을 쥐여 주고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누런색의 작은 알약들이 통에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다시 운동하러 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운동 후에 씻고 나왔을 때 느껴지는 개운함은 항상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날이었으나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평소에 느끼는 비루한 감정들과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그래서 요즘은 혼자 있어도 별로 괴롭지 않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혹은 자살률이 많이 올라간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희망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루에 십분 국민체조를 하는 습관이 아닌가 하는.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나와 관련 없는 일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근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문득 모피어스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운동 초반과 비교했을 때 더이상 들 수 있는 무게가 확확 늘지는 않았고, 강도에도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승환이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처럼 모피어스가 알약을 건넨 것도 하나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운동 가방 안에서 땀에 절어 있는 운동복을 뒤적거리다가 약통을 찾아냈다. 정수기 앞에서 물을 한 컵 받았다. 손바닥에 알약을 하나 꺼내놓고는 고민 끝에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같이 일 한지 상당히 시간이 지났음에도 술자리에서야 겨우 통성명을 하게 되었던 여자애들은 어째서인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얼굴을 비춰봤다. 머리 모양새를 바로 잡은 다음 미소를 지어 봤다. 조금 어색한 느낌에 멋쩍게 다시 앞머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꾸 핸드폰은 왜 자꾸 봐?”
옆자리에 앉은 지수가 말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서인지 얼굴이 상기 되었다.
“아니,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고 다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호와 희주,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지수.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마치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호프 안은 조금 어두운 듯했으며 스포츠 중계가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는 예쁜 여자애가 앉아 있었으며, 평소와는 다른 활기 속에 있었다. 그동안의 삶이 음지에서의 삶이었다면 지금은 엄연히 양지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느긋한 기분으로 술잔 안에 있는 맥주를 마셨다. 시원했고, 청량감이 느껴졌으며 에어컨 바람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사장 새끼, 좀 이상하지 않아?”
“아 사장, 그 새끼요? 완전 속물이던데, 여자도 겁나 밝히는 거 같고.”
지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동호 오빠한테도 되게 못되게 굴던데. 말도 심하게 하고.”
갑자기 화제가 사장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별 상관은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 원래 조금 속물적인 사람인 것은 확실했고 그동안 내게 해 온 짓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욕은 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더불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요즘에는 조금은 누그러져 친절해지기까지 한 그의 태도도 달갑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한없이 느긋해지는 밤이었다. 건네는 말 한마디 제스처 하나마다 내가 그들의 무리 속에 속해 있다는 실감을 주었다. 지금의 나는 이끼 정도의 존재에서 적어도 햇볕아래에 있는 풀 한 포기 정도는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잘 된 일이었다. 갑자기 지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 나중에 날 잡아서 호캉스나 갈래요?”
희주가 눈을 빛냈다.
“좋지, 날짜랑 호텔이랑 잡자. 승환 오빠도 갈 거죠?”
승환은 대답 대신 약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호 오빠도 같이 가요.”
옆자리에 앉은 지수가 다시 말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묘한 미소를 짓게 되었고, 계속되는 재촉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지수는 어깨를 살짝 때리면서 기쁜 내색을 해 보였는데, 그 모습에 살짝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누가 저딴 싸구려 내숭에 속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렇게 가짜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계속해서 바뀌었고, 자제하지 못하고 술을 마신 탓에 취기가 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자리를 파할 때가 되자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할 때가 되자 희주는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웬일인지 승환이 먼저 술값의 반을 계산했다. 때문에 나도 지수에게 나눠서 내자 하기에는 속이 좁게 보일 것 같아 나머지 반을 카드로 긁었다.
거리로 나오기가 무섭게 희주와 승환은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다음에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우연스럽게도 지수와는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다. 역까지 나란히 걷게 되었고,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게 그동안 미라같이 말라비틀어졌던 내 청춘에도 생기가 돌아올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바닥을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아까부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수였다. 어쩌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 당장 날 죽이고 지갑을 털어간다는 것은 아니었고, 로맨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큰길을 걸으면서 지수가 말했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오빠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이네요.”
가만히 오늘 내가 몇 마디나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사용하면 셀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다행이다.”
“일 끝나거나 쉬는 날에 종종 같이 술 먹어요.”
“불러주면 고맙지, 오늘 나도 재밌었어.”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지수는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했는데, 어쩌면 조금은 수줍게도 보이는 행동이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둘이서도 한 번 봐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가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12시가 조금 안 되었는데, 막차까지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곧 전화가 울렸고 승환이었다. 그는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걸음을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도 정류장에 도착하니 눈앞에서 막차가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묻고는 그가 이야기 한 곳으로 향했다.
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우습게도 승환과 나는 같은 장소에서 마주 앉아 다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언짢은 기분이 되어서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아니, 희주 그년이, 오늘 그냥 집에 간다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같이 모텔에 가려고 하는데, 안 된다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비싸게 굴었다고.”
몇 마디 듣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산이 끝나서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야, 너 전에 알바생 번호 따지 않았냐?”
“아 걔? 그랬지. 지금 사귀어.”
“근데, 희주랑 자고 그래도 돼?”
“혼전순결이라도 지키라고 하겠네. 여친은 여친이고, 섹파는 섹파지.”
“그래, 니 맘이지 뭐.”
순간 그 알바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저런 새끼를 고른 것도 네 복이지. 속으로 읊조리고는 가만히 가게 유리창 너머로, 거리를 쳐다봤다. 밤이 깊었지만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며, 죄다 취한 것처럼 보였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승환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진열장에 있는 하나의 물건인지도 몰랐다. 기분에 따라 이것저것 갈아 끼워 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것들. 그러나 이런저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순리였고, 그 이런저런 사람들 중 태반이 승환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지수가 너한테 관심 있던 거 같은데, 잘 해봐라. 한 2달 정도면 진도 꽤 나갈 수 있을걸?”
갑작스러운 승환의 말에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오늘 옆자리의 지수를 보면서 조금은 호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기에 쑥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뭔데.”
“어휴, 이 새끼 아다 티 내나. 됐다.”
그러나 갑자기 아까전에 진도 운운한 것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찝찝한 기분이 되었다. 설마 했지만 곱씹을수록 신경 쓰여서 결국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야, 근데 아까 그거 뭔 얘기냐?”
“뭐가?”
“진도, 뭐시기 한 거.”
“아 그거, 별 건 아니고 전에 몇 번 지수랑 잔 적이 있거든.”
흠칫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왜 걔랑 결혼이라도 하게? 기분 상했냐? 원래 다 그렇게 노는 거야.”
그런 건가. 원래 다 이렇게 노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선망만 해 왔던 양지의 삶이었기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분이 오래 놔둔 배춧잎처럼 시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술을 따라서 마셨다. 승환의 말에는 적당히 대꾸하고 말았다. 갑자기 금파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금파리의 암컷은 짝짓기 후에 수컷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수컷들은 더 똑똑해져서 먹이를 고치에 싸서 암컷에게 선물을 하죠. 암컷이 고치를 풀 동안 수컷은 일을 마칩니다. 그런데 수컷은 한 가지 묘수가 떠오릅니다. 굳이 고치 안에 먹을 것을 넣어둘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들은 이제 암컷에게 빈 고치를 선물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암컷이 아닙니다. 고치를 흔들어서 빈 것을 확인하면 수컷을 잡아먹습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승환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꿀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 정신을 놓을 때까지 주의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금파리의 고치 안에 들어있는 기분이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갈증이 났다. 나도 모르게 왼쪽 눈으로 손이 갔고, 핸드폰을 켜서 뉴스를 보았다. 왠지 모르게 다시 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세수하면서도 유심히 살펴봤지만 이상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어제 술을 많이 마셔도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가끔 있지 않은가, 그런 날이. 씻고 언제나처럼 준비를 마친 후에 일을 갔다. 가게 안에서 지수는 알은 체를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늘 그렇듯이 사장도 승환도 다른 사람들도 친절했다. 농담을 하면서 움직이니까 일도 이제는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잠깐 움직이고 시계를 보면 어느새 3시가 되었고, 5시가 되었으며, 9시가 되었다. 그리고 나면 인사를 하고 퇴근을 하는 것이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하루를 보내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생각을 하다보면 마치 복잡한 것들에 쌓여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고민 같은 것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일을 마친 후에는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했다. 샤워하고 나와서는 여느 때처럼 약통을 열어서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켜 넣었다. 통이 가벼워 흔들어보니 거의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 있는 내 모습을 봤다. 운동 능력이나 몸이 약을 먹고 나서 많이 좋아진 느낌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다가 나중에 다 떨어지면 모피어스한테 가서 좀 더 얻을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은 전봇대가 켜져 있음에도 어두웠다. 걸음을 옮기면서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걷고만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면서 어쩐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이유는 없지만 머릿속으로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져 꺼내서 확인했다. 지수였고, 주말에 약속 없으면 영화나 한 같이 보자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렇게 하자며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문자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가 메스꺼운 느낌이 들어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나서부터인가 등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고 속도 종종 안 좋았다. 근처에 있던 전봇대로 가서 속에 있던 것을 다 게워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떨어졌다. 예리한 파열음이 들렸고, 들어서 확인해 보니 액정이 깨져 있었다. 무심코 깨진 액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안에는 내 얼굴이 있었는데 깨진 파편들이 이목구비를 일그러지게 보이게 만들었다. 별다른 생각은 안 들었고,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입가를 슥 닦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익숙한 생김새의 고양이 한 마리가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손을 내밀어 불러 보았지만 무시하고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봇대에 찌그러진 캔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본 적이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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