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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통해 세상을 보다

나혼자 보려고 만든 <롤> 리그 오브 레전드 소설 모음 #1

by 책과함께라면 2020.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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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플랭크 배경이야기

 

갱플랭크 바다의 무법자

 

몰락한 해적왕 갱플랭크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 그림자와 어두운 물결을 몰고 다니는 자. 검은 깃발이 수평선 너머 아득해도 용감한 선원들마저 벌벌 떨었다.

갱플랭크는 열두 바다의 무역로를 헤집고 다니며 악명을 떨쳤다. 아이오니아에서는 톱니칼날 사원을 뒤엎어 무시무시한 그림자단의 분노를 일으켰고, 녹서스 함대의 자랑인 레비아탄 호를 보란 듯이 빼앗았을 땐 스웨인이 기필코 이자를 찢어발기겠노라 이를 갈았다.

수많은 자객과 현상금 사냥꾼, 함대들이 갱플랭크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누구도 정의의 심판을 내리지 못했다. 갱플랭크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끝없이 치솟는 것을 즐겼다. 보물을 가득 싣고 항구로 돌아올 때면 자랑스레 현상수배 게시판에 직접 수배지를 붙이곤 했다.

그러나 악명 높은 갱플랭크도 미스 포츈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최근 빌지워터의 항구에서 갱플랭크의 배가 난파되었다. 무적이었던 갱플랭크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빌지워터의 범죄단들도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빌지워터를 지배하기 위한 혈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갱플랭크는 이 폭발로 인해 수많은 상처를 얻고 팔마저 잃었다. 치명적 상처를 입고,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지금 갱플랭크는 새로 얻은 금속 팔을 번쩍이며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단편소설  - 피바다

 

녹서스 함장의 도끼가 갱플랭크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칼등을 꺾어 함장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갱플랭크가 숨을 헐떡였다. “녹서스식 공격이다. 이 해적 놈아.” 갑옷 사이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뼛골이 다 떨리는 구만!” 때마침 먹구름이 두 척의 배 위로 몰려오고 있었다. 갱플랭크는 단검을 움켜쥔 채 내달렸다. “봐, 하늘은 내 편이다!”

녹서스 함장의 갈비뼈 사이에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 거대한 육체가 푹 고꾸라졌다. 떨구어진 도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갑판에 박혔다. 문신이 새겨진 입술에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갱플랭크는 비열한 웃음과 함께 단검을 거두고 죽어가는 함장을 조타석이 있는 뱃머리로 끌고 갔다. 무거운 갑옷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배 위를 맴돌았다. 함장의 피가 바다 속으로 스러졌다. 두 척의 배는 파도가 칠 때마다 하얀 포말을 흩뿌리며 춤추듯 출렁였다.

 

 

 

 

 

 

갱플랭크는 검게 변한 이와 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느새 장대비가 쏟아져 욱신거리는 복부의 상처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갱플랭크는 부상을 숨기려고 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에 도취한 부하들은 번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비바람뿐인 침묵 속에서 갱플랭크는 살아남은 녹서스 인들을 살펴보았다. 피로와 분노로 일그러져 우는 동시에 웃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 배는 이제 내 것이다." 갱플랭크가 바닷바람을 압도하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딴소리할 놈 있나?"

혈맹문신을 얼굴에 새긴 거대한 녹서스 전사 한 명이 갱플랭크를 노려보며 앞으로 나왔다. 목소리는 원한에 차 높고 가늘게 떨렸다. "우리는 녹서스의 아들들이다. 네깟 놈들에게 배를 빼앗기느니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 비통한 외침이 빗줄기를 찢고 선체에 메아리 쳤다.

"그러시든가." 갱플랭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호탕하게 되받아쳤다.

"다 죽여 버려라! 그리고 이놈들의 배는 흔적도 없이 태워버려라!"

 

 

미스 포츈 현상금 사냥꾼 배경이야기

 

 

소금기 가득한 도시, 핏줄처럼 구불구불한 미로를 감춘 도시. 빌지워터에서 악명을 떨친 이들이 대개 그렇듯 사라 포츈 역시 많은 이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

사라는 유명한 총기 장인인 애비게일 포츈의 딸로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본토 앞바다에 자리 잡은 섬에 살며 사라는 엄마의 대장간에서 방아쇠를 다듬거나 맞춤 탄환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애비게일의 총기 제작술은 명성이 자자했으며, 맞춤 제작한 권총은 부유한 상선 선장들이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가끔은 사악한 악당들 역시 애비게일의 권총을 탐내곤 했다.

빌지워터의 신출내기 해적 갱플랭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갱플랭크는 애비게일에게 최고의 권총 두 자루를 만들라고 건방지게 강요했다. 마지못해 거래가 성사되었고 갱플랭크는 일 년 뒤 총을 찾으러 돌아왔다. 처음부터 값을 치를 생각이 없었던 갱플랭크는 지저분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강제로 권총을 빼앗으려고 했다.

애비게일이 만든 두 자루의 권총은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만듦새는 정교했으며 정확도도 뛰어났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불한당으로 변해 버린 갱플랭크에게 권총을 넘겨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분노한 갱플랭크는 권총을 집어 들어 애비게일 부부와 사라에게 발사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대장간에 불을 지르고 돌바닥에 쌍권총을 집어 던졌다. 룬테라에서 포츈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얼마 후, 사라는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심각한 부상이었음에도 사라는 망가진 쌍권총을 품에 안고 불타는 대장간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 되어 오랫동안 사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견디고 또 견뎠다. 사라는 어머니의 쌍권총을 수리하고 복면의 살인자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그자는 빌지워터의 새로운 해적왕을 자처하며 다른 유력한 선장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상관없었다. 사라는 철저히 복수를 준비했다.

빌지워터 만에 상륙하자마자 사라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상대는 마이런의 흑주에 잔뜩 취한 해적으로 현상금이 걸려 있던 자였다. 사라는 그를 질질 끌어 보안관 앞에 던져 놓고 수십 개의 현상 수배 전단을 뜯어낸 다음 시내로 향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공고 속 현상 수배범들은 모두 사라졌다. 사라의 표적이 된 불운한 범죄자들은 죽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때부터 술집이나 도박판에서 '미스 포츈'이라는 이름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갱플랭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빌지워터에 널리고 널린 것이 현상금 사냥꾼이었으니까.

이후 수년간 미스 포츈의 명성은 널리 퍼지고 점점 화려해졌다. 비단 검 해적단의 두목을 럼주통에 처박아 버리거나, 손버릇이 나쁜 한 선장으로부터 '사이렌호'를 빼앗기도 했다. 또한 학살의 부두에서 반으로 절단된 레비아탄의 뱃속에 숨어 있던 미치광이 살인마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톱니 갈고리단의 비호를 받는 갱플랭크에게 대놓고 맞설 수는 없었다. 미스 포츈의 목표는 놈의 목숨뿐만이 아니었다. 비참한 굴욕을 선사하고, 그동안 도적질한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고 난 뒤에야 애비게일의 대장간에서 죽어 버린 소녀의 한이 풀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라는 소수정예의 심복들을 모집해 복수를 준비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미스 포츈은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을 개시했고, 결국 갱플랭크의 데드 풀호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포악한 해적왕의 압제가 끝나는 순간을 모든 빌지워터인이 목격했다. 사라가 꿈꾸던 복수가 계획대로 이뤄지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복수의 짜릿함은 금방 지나갔다.

갱플랭크가 사라지자 다른 선장들이 도시의 패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형식적이나마 존재하던 법도 무시된 채 수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어쩔 수 없이 미스 포츈은 사이렌호의 선장으로 추대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질 휴전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빌지워터에서 영원한 것은 없듯이 미스 포츈은 해적, 깡패 우두머리 등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이에게 누가 이곳의 주인인지 가르쳐 주어야 했다.

빌지워터를 차지하기 위한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단편소설

 

깊은 바닷속으로

글: 그레이엄 맥닐, 아트: 메리 매그니

빌지워터의 백색 선착장은 그곳을 가득 메운 하얀 새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죽은 자를 위한 쉼터로 제격인 이름이 아닌가? 빌지워터 사람들은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바다로 돌려보냈다. 차가운 심해로 가라앉은 사람들의 묘비는 수백 개가 넘는 부표가 대신했다. 바닷물이 넘실거릴 때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이 일제히 흔들렸다. 어떤 것들은 이름뿐이었지만 위풍당당한 크라켄이나 풍만한 섬 처녀를 조각한 부표도 있었다.

미스 포츈은 궐련을 가볍게 물고서 선착장 끝에 있는 환희의 럼주 통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한 손에는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관에 연결된 산소 튜브를, 다른 한 손에는 녹슨 도르래로 관 뚜껑에 연결된 다 해진 밧줄을 쥐고 있었으며 쌍권총은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차고 있었다.

가의 굽은 지붕에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갈매기들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누구보다 새로운 먹잇감이 생길 신호를 잘 알아채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왔군.” 미스 포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용 비늘 코트를 입은 대머리 남자가 악취 나는 좁은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선착장의 쥐 떼가 남자를 쫓아오며 찍찍거렸다. 혹시나 자신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남자의 이름은 자크문트 자이글로스로 문신 형제단 중 한 명이었다. 문신을 한 해적은 많았지만 자이글로스의 문신은 그 중에도 특별했다. 비단뱀, 연인들, 침몰시킨 배들, 죽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온몸이 뒤덮여 있었다. 미스 포츈의 눈에는 어떤 자기소개서보다 완벽해 보였다.

자이글로스는 결연하게 저벅저벅 걸어왔지만 초조한 눈빛을 감추진 못했다. 허리춤에 상어 이빨 모양의 긴 검을 꽉 움켜쥐고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총은 한눈에 봐도 값진 것으로 매끄러운 금속관이 달려 있었다.

“내 동생은 어디 있나?” 자이글로스가 물었다. “데리고 온다고 했잖아!”

“그거 필트오버 마법공학 소총인가?” 미스 포츈이 자이글로스의 질문을 뒤로하고 물었다.

대답부터 해.”

“네가 먼저 대답하면!” 미스 포츈은 코웃음을 치며 도르래에 걸친 밧줄을 스르륵 풀었다. 관이 물속으로 기울며 조금 더 깊게 잠겼다. “이 튜브가 얼마나 긴지 모르겠네. 동생이 숨을 못 쉬어 몸부림치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자이글로스는 씩씩거리더니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미스 포츈은 그의 낯빛이 바뀌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길. 그래. 필트오버제다.” 자이글로스가 총을 꺼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비싼 거네.” 미스 포츈이 말했다.

“너라면 잘 알겠군.” 조롱 섞인 말투로 자이글로스가 되받았다.

미스 포츈이 다시 밧줄을 풀었다. 완전히 잠겨버린 관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왔다.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전보다 더 커졌다. 자이글로스는 손을 높이 들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가 빌었다. “총을 줄 테니 일단 동생부터 꺼내줘.”

“얌전히 따라올 거야?”

자이글로스는 체념한 듯 웃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네가 내 배를 침몰시켰고 부하들도 전부 죽였으니까. 가족들은 빈민굴이나 감옥에 보내버렸고.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냐? 마법공학 총? 아니면 현상금?”

“둘 다. 근데 다른 이유도 있어.”

“젠장. 대체 내 몸값이 얼만데 그러는 거냐.”

“돈으로? 바다뱀 은화 500닢.”

“고작 바다뱀 은화 500닢 때문에 이 소동을 벌이셨다?”

“넌 돈 때문에 죽는 게 아냐. 갱플랭크의 부하라서 죽는 거지.” 미스 포츈이 말했다.“네가 죽는 이유는 그거야.”

“죽는다고? 잠깐. 현상금 공고에는 생포하라고 되어있을 텐데!”

“그렇지. 근데 이걸 어쩌나. 난 별로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라서.” 미스 포츈이 밧줄과 산소 튜브를 손에서 놓으며 말했다. 관은 거품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심해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내 자이글로스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칼을 뽑아 들고 내달렸다. 미스 포츈은 그가 코앞에 다다를 때까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쌍권총이 불을 뿜었다. 한 발은 눈을, 다른 한 발은 심장을 관통했다.

미스 포츈은 궐련을 바다에 뱉어 버린 다음 총구의 연기를 후 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걸. 그 미친놈이 야수같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어. 이건 정당방위라고.”

미스 포츈은 마법공학 소총을 주워 이리저리 살폈다. 그녀의 취향에는 너무 가벼웠지만 잘 만들어진 위협적인 총이었다. 총의 기름 냄새가 미스 포츈의 기억을 불러냈다. 제작소의 포근한 분위기,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던 엄마의 감촉, 따듯한 바닷바람과 웃음소리.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듯했다. 미스 포츈은 회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다에 마법공학 소총을 내던졌다. 전리품은 바다에 바치는 게 마땅했다.

미스 포츈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이글로스의 시체는 부둣가에 남겨두었다. 빌지워터에서는 시체를 바다로 돌려보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갈매기와 쥐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게다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으니 백색 선착장에서 보기 드문 진수성찬이 되리라.


일라오이크라켄의 여사제 배경스토리

 

일라오이의 탄탄한 체격은 굳건한 신앙심만큼이나 압도적이다. 대 크라켄 신의 여사제인 일라오이는 거대한 황금빛 성상으로 적들의 몸과 영혼을 분리해 상대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린다. 나가카보로스 신을 섬기는 '진리의 사도'에게 맞섰다가는 일라오이뿐만이 아닌 바다뱀 군도의 신을 함께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라오이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 존재감에 압도당한다. 이 막강한 여사제는, 원하는 것은 손에 넣고 증오하는 것은 파괴하며 사랑하는 것은 모조리 만끽하는 그런 충실함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일라오이를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평생을 바쳐온 신앙을 빼 놓을 수 없다. 나가카보로스, 그녀가 모시는 신은 거대한 뱀의 머리를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촉수를 한없이 휘감으며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여왕 바다뱀, 대 크라켄 신, 심지어는 수염 달린 여신으로도 불리는 나가카보로스는 생명과 바다 폭풍, 움직임을 관장하는 바다뱀 군도의 신이다. (나가카보로스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바다와 하늘을 다스리는 무한한 괴물’이란 뜻이다.) 이 종교의 핵심 교리는 세 가지로, ‘모든 혼은 우주를 섬기기 위해 태어났다’가 그 첫 번째요, ‘욕망은 우주가 모든 생에 새겨놓은 것이다’가 그 두 번째,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욕망을 좇을 때 우주가 비로소 그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마지막 세 번째이다.

하급 여사제는 신전을 관리하고 신성한 뱀을 부르며 사람들에게 나가카보로스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그들과 달리 일라오이는 진리의 사도로써, 우주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며 직접 신을 섬긴다. 그녀는 이 사명을 위해 두 가지 신성한 임무를 맡고 있다.

 

 

 

 

 

진리의 사도가 받든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언데드와의 전쟁에서 선봉에 나서는 것. 우주의 자연스런 흐름에서 벗어난 언데드는 나가카보로스에 반하는 가증스러운 무리이다. 나가카보로스의 여사제라면 누구나 해로윙 때 토착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그 중에서도 진리의 사도는 가장 강력한 악령들과 직접 맞서 싸우고 검은 안개를 물리쳐야 한다.

두 번째 임무는 잠재력이 뛰어난 인간들을 찾아내 나가카보로스의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사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직무다. 일라오이는 거대하고 신성한 고대 유물인 ‘신의 눈’을 휘둘러서 상대의 혼을 육신에서 떼어내고, 벌거벗은 혼 그대로 자신을 대면하게 하여 그 인물의 진가를 밝혀낸다. 대 크라켄 신은 겁쟁이와 의심하는 자, 억지로 참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므로 진가를 나타내지 못한 자는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일라오이가 파괴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시험에서 살아남은 자는 영원한 변화를 겪으며 진실된 운명을 추구할 의지를 얻기도 한다.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진리의 사도로 존경받는 일라오이. 오랫동안 내려온 교단의 전통을 깼던 일화를 보면 그녀를 알 수 있다. 진리의 사도가 되기 위한 훈련을 완수하고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부흐루의 황금 신전을 떠나서 불결하고 빈궁한 빌지워터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바다뱀 군도에서 외지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그 해적 도시뿐이다. 교단의 신도들은 하나같이 빌지워터를 악취가 진동하는 시궁창으로 여겼다. 다른 진리의 사도들은 빌지워터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그곳을 찾는 외지인들을 불가촉천민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라오이는 이런 관습을 깨고 해로윙 때 빌지워터 주민들을 지켰으며, 심지어 빌지워터 출신인 자에게 영혼의 시험을 치르게까지 했다. 여전히 빌지워터에 문을 연 신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본토 출신 이방인도 거의 없다. 그렇다 해도 빌지워터에 여왕 바다뱀에 대한 믿음을 널리 퍼트린 건 일라오이이고, 그녀의 굴하지 않는 열정 덕에 주민들도 나가카보로스 신앙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때 빌지워터에서 가장 악명 높고 잔악했던 해적이 이 거구의 여사제에게 실연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직접 그녀를 만나 본 사람이라면 과연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거친 행동 뒤에는 섬세한 지성과 힘, 그리고 사람을 끌어 당기는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빌지워터 사람 대부분이 일라오이를 환영하며 은총을 구하지만, 모두들 한편으로는 이 크라켄의 예언자가 행하는 시험을 두려워하고 있다.

''멈춤이란 없으리. 우리가 곧 움직임일지니.''

—나가카보로스의 20가지 지혜


단편소설 부담

 

“진리의 사도여. 부흐루로 퇴각해야만 하오. 육지 출신들은 구할 수 없지 않소?” 대사제가 말했다. 건장한 체격의 이 여사제는 빌지워터를 떠날 생각에 흡족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똑같은 소리 좀 그만 하시게.” 일라오이는 방 한가운데 자리잡은 돌탁자 주변을 걸어 다니다 하품을 쫓으려는 듯 어깨를 돌려 근육을 풀었다.

대사제 옆에는 밧줄로 만든 제의를 입은 나이든 바다뱀 몰이꾼이 서있었다. 쪽빛으로 물들인 밧줄 하나하나가 구불구불하게 엮여 있었다. 제각각인 두께와 빛 바랜 크라켄 먹물 때문에 엉성하게 베어낸 촉수 더미를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 정도였다. 노인의 얼굴은 검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바다 괴물의 입속에 끝없이 돋아난 이빨을 나타낸 듯했다. 수도승과 바다뱀 몰이꾼은 항상 무서워 보이려 한다. 참으로 거슬리는 짓이었다.

“가장 강력한 괴물들은 빌지워터로 오지 않을 겁니다.” 바다뱀 몰이꾼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큰 놈들은 학살의 부두에서 나오는 악취가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 틀어박혀 있죠. 고작해야 굶주린 새끼 몇 마리만 부름에 응할 겁니다.”

나가카보로스를 섬기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이들만이 안개를 몰아내고 해로윙으로부터 빌지워터를 지킬 수 있다.

바다뱀 군도의 다른 곳은 별 문제가 없다. 역시나 빌지워터 사람들이 무지한 탓이다. 육지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민물이 마음껏 흘러 부두를 정화할 공간을 주지 않았다. 외지인들이 닻을 내리고 완전히 자리를 잡자 비어 있는 해안가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리석은 자들. 사제들 대부분은 육지 녀석들이 사실은 검은 안개에 당하길 바란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젠장할.” 일라오이가 외쳤다. 여기 남으려면 바다뱀의 도움 없이 빌지워터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라오이는 주변에 놓인 공물 그릇에서 먹을 것을 찾아 깨지락대다가 망고를 집어 들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눈앞의 멍청이 둘은 도저히 쓸모가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기는 데 갑자기 우지끈 큰 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 육중한 나무문이 쾅 하고 열린 것이었다.

갱플랭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돌 벽에 부딪혀 메아리 쳤다.

“그대가 지시한 대로 바다에서 건져 왔소.” 대사제가 자신의 역할을 나타내는 옥빛 옷깃을 바로잡으며 미소 지었다. “저자의 에너지가 나가카보로스님께 돌아가도록 두는 게 나았을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심판하는 건 자네 소관이 아니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님. 그건 물론 나가카보로스님의 일이지요.” 몰이꾼의 대답 속에 뼈가 있었다.

일라오이가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난쟁이마냥 작아진 듯했다. 일라오이는 섬사람 치고도 큰 편이었다. 살아오며 그녀의 키를 넘는 이는 보지 못했다. 가장 큰 프렐요드인보다도 컸다. 어릴 적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추장스런 존재라고 생각해 항상 남의 눈치를 봤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움직일 때 거치적거리는 건 바로 다른 이들이라고.

일라오이는 신의 눈을 받침대에서 들어 올렸다. 황금 성상은 와인통보다 크고 몇 배는 더 무거웠다. 차가운 금속에 닿은 손가락이 아렸다. 옆에는 거대한 장작불이 온 방을 밝히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신의 눈은 언제나 차갑고 눅눅한 느낌이었다. 일라오이는 무거운 성상을 능숙하게 어깨에 짊어졌다. 10여 년 넘게 성상에서 두 발짝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난 내 의무를 잊지 않고 있다.” 일라오이는 층계를 내려가며 말했다. “부흐루로 퇴각하지 않을 것이야. 여기서 해로윙을 막겠다.”

대사제는 부흐루를 떠나 여기로 온 후로 줄곧 불평만 하고 있지만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갱플랭크의 해적선이 폭발했을 때 일라오이의 가슴은 쿵 내려 앉는 듯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지, 그리고 관계를 끝내버린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때는 그래도 그 멍청하고 늙어빠진 녀석을 사랑했었다.

높고 촘촘한 돌 벽에 둘러싸인 신전 뜰은 이빨 돋은 바다 괴물의 입속 같았다. 신전 입구는 저 멀리 아래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일라오이는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가 앞문으로 향했다. 갱플랭크의 주둥이를 한 대 내리칠 참이었다. 항상 오만하고 럼주에 절어 있는 인간. 그래도 그 얼굴을 볼 수 있단 건 좋았다.

하지만 씩씩대며 입구에 서있는 녀석의 모습은 그녀가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부상을 입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갱플랭크는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등을 구부리고 서있었다. 잘려 나간 한쪽 팔을 감싼 채였다.

그는 반쯤 미쳐 남은 한 손에는 권총을 쥐고 휘두르며 주위의 수도승들과 여사제들을 쫓아내려 했다. 겨우 몇 시간 전에 자신을 바닷속에서 꺼내준 이들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권총은 비어 있어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일라오이는 어디 있나?” 갱플랭크가 외쳤다.

“난 여기 있다, 갱플랭크.” 일라오이가 대답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갱플랭크가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았다.

“미스 포츈 짓이야. 분명 그 녀석 짓일 거야. 뒷골목 쥐새끼 둘이랑 작당해서 침몰시킨 거라고.”

“네 배야 어찌되었건 내 알 바 아니다.”

“항상 떠나라고, 바다로 돌아가라고 말했잖아. 난 배가 필요해.”

“나룻배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여긴 내 구역 이라고!” 갱플랭크가 소리 질렀다.

갱플랭크를 둘러싼 사제들이 발끈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도시보다 수천 년은 오래된, 위험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그런 소리를 뱉을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었다. 다른 육지 출신 인간이 신성하기 그지 없는 진리의 사도에게 그것도 그 신전 안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냈더라면 양 무릎이 부러진 채로 바다에 처박혔을 것이다.

“여긴 내 구역이야!” 녀석이 다시 외쳤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침까지 튀었다.

“그럼 너는 뭘 할건가?” 일라오이가 물었다.

“나, 난 오카오와 다른 부족장 녀석들의 힘이 필요하다. 당신 말이라면 녀석들도 따르겠지. 녀석들에게 말해주면 날 도와줄 거다.” 갱플랭크는 일라오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너는 뭘 할건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갱플랭크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미스 포츈이 내 배를 침몰시키고 내 부하들도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내 팔까지 이렇게 만들었어. 내게 남은 거라곤… 예전에 여기 자주 오곤 했었지.”

“자리 좀 피해 주게.” 사제들에게 말하며 일라오이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갱플랭크를 내려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이었다. 술과 고뇌가 그 늠름하던 모습을 다 앗아갔다.

“내게 이제 남은 거라곤 이 도시 밖엔 없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눈이 마주치자 갱플랭크의 목소리가 잦아 들었다. 일라오이는 크라켄마냥 엄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갱플랭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나가카보로스의 여사제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 됐다. 속으로는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절망에 빠진 늙은 해적 선장이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할 순 있네. 내 말 한 마디면 부족과 오카오의 무리도 곧바로 도와줄 걸세.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망할, 좀 도와줘! 나한테 빚진 게 있잖아.”갱플랭크는 아이처럼 발끈했다.

“내가 빚을 졌다고?”

“의식도 따르고 제물도 바쳤다고.” 갱플랭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가르침은 받아 들이지 못한 것 같은데? 의식? 제물? 그건 나약해 빠진 인간들이 보잘것없는 잡신을 모실 때나 하는 소리지. 나의 신께선 행동을 원하신다.”

“나는 이곳을 위해 고통 받고 피를 흘렸다. 여긴 당연히 내 도시야!”

일라오이는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갱플랭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배가 침몰하기 수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간 갱플랭크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이 남긴 증오심과 자기 연민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고 곪고 있었다. 일라오이는 자신의 책무를 외면했다. 한때이지만 그를 사랑했기에 외면한 것이었다. 그를 잘못된 길로 밀어 넣은 건 그를 떠난 자신이었기에 그리했다. 그저 살인자, 골수 해적으로 만족하며 살던 갱플랭크는, 해적왕이라는 아버지의 이름에는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헤어진 후 갱플랭크는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더니 빌지워터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았다.

일라오이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 나가카보로스의 시험을 치른다면 살아 남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지금 그것을 위해 여기 있는 거였다.

일라오이는 눈 앞의 늙은 해적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내야 할까? 약간이나마 힘이나 야망이 남아있어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보내버리면 적어도 살아 남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나가카보로스의 방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진리의 사도의 사명에도 어긋났다. 의구심을 가지거나 과거를 곱씹어볼 때도 아니었다. 신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신의 직감도 믿어야만 한다. 갱플랭크가 시험을 받아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게 바로 신의 뜻이었다. 고작 사내 하나가 신에 비할 대상이나 되는가?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일라오이는 어깨에서 그 무거운 황금 성상을 끌어 내렸다. 어깨가 다시 가벼워졌지만 어째선지 여전히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제발.” 갱플랭크가 간청했다. “적어도 인정은 베풀어 주게.”

“너에게 진실을 보여 주겠다.” 일라오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 발로 갱플랭크를 걷어 찼다. 발꿈치가 그의 코를 강타하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주정뱅이마냥 뒤로 나가떨어졌다. 입술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갱플랭크는 몸을 뒤집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일라오이를 올려다 봤다.

“보아라!” 일라오이가 읊조렸다.

마음 속에서 대모신의 에너지를 부르며 일라오이는 거대한 성상을 앞으로 휘둘렀다. 성상의 입에서 반짝이는 안개가 쏟아져 나왔고 대모신의 얼굴 주위로 청록빛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투명한 촉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금빛이 어른거리는 촉수는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아름답고 해저 가장 어두운 곳의 추악한 그 무엇만큼이나 끔찍했다. 성상에서 더 많은 촉수가 자라 나오자 어떤 알 수 없는 섭리를 따르는 듯 주변에서도 촉수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촉수가 자라나는 모습이 마치 세상의 모든 희망과 공포를 나타내는 듯 했다. “안 돼!” 갱플랭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촉수의 회오리는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그를 집어 삼켰다. “나가카보로스 님을 맞이하라!” 일라오이가 외쳤다. “네 자신의 가치를 보여라!” 촉수가 갱플랭크를 움켜쥐더니 가슴속으로 찌르고 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는 환영에 둘러싸인 갱플랭크는 몸서리쳤다. 육신에서 영혼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일라오이의 눈 앞에 그의 영혼이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영혼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파랑으로 타올랐고 몸은 과거를 비추며 흔들렸다. 촉수 무리가 부상 입은 갱플랭크를 덮치려 했다. 그는 몸을 굴리고 비틀비틀 움직이며 최대한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하나를 피하면 더 나타났다.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더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촉수 무리가 그를 때리고 내리누르고 잡아당겨 점점 영혼과는 먼 곳으로, 망각의 길로 끌어 당겼다. 일라오이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눈을 멀리 돌리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훌륭한 사내였지만 실패했다. 이것은 우주가 원하는…

그때 갱플랭크가 일어섰다. 천천히, 하지만 거침없이 그는 다 부서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촉수 무리에서 빠져 나오더니 어렵게 한 걸음씩 떼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피에 젖고 지친 모습으로 그는 마침내 일라오이 앞에 섰다. 두 눈은 증오와 고통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결심도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그는 빛나는 영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바람이 멈추었다. 촉수는 빛을 내며 산산이 흩어졌다. 나가카보로스가 만족한 것이다.

“움직일 줄 아는군.” 일라오이가 미소 지었다.

갱플랭크는 옛 연인을 코 앞에 서서 쏘아보았다. 등은 구부러져 있었지만 가슴 속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위대한 선장으로 우뚝 선 것이다.

갱플랭크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여전히 만신창이에 절뚝거리고 있었지만 예전의 기개가 보이는 걸음이었다.

“내가 다음에 도와달라고 하거든 그냥 싫다고 말해.” 그는 씩씩거렸다.

“팔은 좀 어떻게 해봐.”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그가 신전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는 저 아래 바다를 향해 길고 긴 계단을 걸어내려 갔다.

“멍청한 영감탱이.” 일라오이가 웃었다.

수도승과 대사제가 전실로 돌아오자 일라오이는 할 일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걸 기억해 냈다. 져야 할 소소한 짐이 넘쳐났다. 사라 포츈을 만나야 했다. 곧 나가카보로스가 미스 포츈도 시험하려 하리라.

“오카오와 부족장들에게 갱플랭크를 도우라고 전하게.” 일라오이가 대사제에게 말했다. “다시 도시를 손에 넣게 도와주라고.”

“빌지워터는 혼란에 빠져 있고 수많은 이가 그의 목을 노리고 있소. 하룻밤도 못 버틸 거요.” 대사제는 계단을 애쓰며 내려가는 갱플랭크를 보고 투덜댔다.

“하지만 그 일에 적격인 자요.” 일라오이는 신의 눈을 어깨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올바른 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가 언제 죽을지는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주가 우리에게 욕망과 본능을 주었으니, 우리는 이를 믿어야만 한다.

그녀는 성상을 어깨에 얹은 채로 뜰에서 신전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일라오이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카드의 달인 배경스토리

 

바다뱀 삼각주의 유랑민 집단에서 태어난 토비아스 펠릭스는 배척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일찌감치 깨우쳤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국적인 물건에 끌리면서도 기이한 전통 때문에 무시하기 일쑤였으며, 알록달록한 유랑민의 범선은 어디에 정박하든 환영받지 못했다.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토비아스는 사람들의 편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토비아스는 노름판이 벌어지는 천막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견했다. 운과 기술이 필요한 모트휠이나 스태버스코치에서 처음 카드를 손에 쥐었을 때였다. 수년 전, 미신을 믿는 토비아스의 할아버지는 카드를 섞고 나누면서 점을 보는 방법을 가르쳤고, 고모는 상대의 습관을 통해 패를 파악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두 가지 기술을 활용해 토비아스는 크라켄핸드 같은 큰돈이 걸린 판도 노련하게 지배했다. 심지어 한 벌 내의 카드 순서를 '느낌'으로 파악하고 각 카드가 누구에게 분배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종종 속임수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정확히 어떤 속임수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비아스에게 큰돈을 잃은 한 무리의 사내가 복수를 위해 한밤중에 찾아왔다. 싸구려 술에 취한 채로 곤봉을 들고 천막을 차례로 열어젖혔다. 방해하는 사람은 모두 때려눕혔다. 두려움에 휩싸인 토비아스는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동이 튼 후 돌아온 토비아스의 눈에 야영지를 해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만 누구도 토비아스를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토비아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봤기 때문이었다.

토비아스는 애걸복걸했지만,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토비아스는 강둑에 서서 멀어지는 범선을 바라보았다. 남은 거라곤 할아버지가 남긴 낡은 카드 한 벌뿐이었다.

그 후로 토비아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했다. 노름판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기이한 능력을 발휘해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오만하고 건방지거나, 잔혹한 이들의 돈을 따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물론 안전을 위해 몇 판 져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노름판에서 말콤 그레이브즈라는 험악한 남자를 만났다.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토비아스와 그레이브즈는 곧바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수년간 북동부 연안 도시를 휩쓸며 다양한 건수를 올렸다. 사기, 협잡, 강도질을 하며 토비아스는 자신의 능력이 점점 강해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도박사의 행운 이상이었다. 바다뱀 삼각주의 유랑민들은 원시 마법이나 카드점을 멀리했지만, 토비아스는 더더욱 위험한 방법을 통해 카드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했다.

결국 무모한 한탕을 시도하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 다 얘기하기를 꺼렸다. 다만 그레이브즈는 생포되고 토비아스와 다른 공범들은 도망쳤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토비아스는 그레이브즈를 구출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새 출발을 위해 본명을 버리고 '트위스티드 페이트'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 후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여러 노름판을 돌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 다만 도움을 줄 동료가 없어 곤경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감옥에 갇히는 일도 많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가둘 수 있는 감옥은 없는 듯했다. 아침만 되면 조롱하듯이 카드 한 장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빌지워터에서 그레이브즈와 맞닥뜨렸지만, 유력 선장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다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적왕 갱플랭크가 사망하자 두 사람은 곧바로 화해하고 필트오버로 떠났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옛 동료와 재회할 수 있어 기뻤다. 물론 신뢰를 회복하려면 한두 번, 아니 '열 번' 정도 다시 호흡을 맞춰 봐야 하겠지만.


단편소설

 

더블 다운

반짝이는 행운 도박장에서 사람들은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부러움과 대리만족감도 있었지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빈털터리가 되기를 심술궂게 바라는 마음 또한 컸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올가미가 목을 서서히 죄어오는 것처럼 이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카드들이 경고하듯 파르르 떨렸다. 누군지 몰라도 추격자가 바짝 쫓아왔단 뜻이다. 어서 판을 접고 떠야 한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박살낼 기회를 놓치기는 너무 아까웠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상대를 향해 활짝 핀 꽃처럼 웃어 보였다. 광부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돈을 벌어들인 상인, 헨마였다. 헨마는 프렐요드 모피, 수제가죽, 빌지워터의 바다 부적 등 아주 비싼 것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또한, 손에는 평범한 사람은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든 값어치의 금반지를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뽐내듯 끼고 있었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금은보화와 문서 더미 위로 수제 파이프의 향긋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상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헨마님 차례인 걸로 아는데요.”

“이 쥐새끼 같은 놈, 규칙은 나도 알아.” 헨마가 말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문신이 새겨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카드 뒷면에 소용돌이 모양을 끝없이 그려댔다. “화려한 손재주로 주의를 끄는 건가? 나한테 뭔가 얻어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끌다뇨?” 트위스티드는 자신감 있고 세련된 몸짓으로 말했다. “맹세컨대 그런 저급한 수를 쓸 정도로 비열하진 않습니다.”

“아니라고? 근데 왜 자꾸 눈을 굴리는 거지?” 헨마가 연기를 내뿜으며 손을 저었다. “똑똑히 들어. 나는 최고의 꾼들을 상대해왔다. 네놈들의 표정만 봐도 무슨 속셈인지 다 알아.”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빈정거리며 카드를 섞었다. “나리가 예리하시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리곤 모자를 벗어 연극배우처럼 인사를 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눈은 군중들 위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늘 그렇듯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었다. 카드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떨렸다. 입안에서 구역질이 날 것처럼 쓴맛이 났다. 이건 곧 소동이 일어날 신호다.

도박장 한 구석, 안대를 한 남자와 붉은 머리 여자의 허리춤에 총이 얼핏 보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인가? 헨마의 재산을 지키는 자들인가? 헨마가 부하들을 데리고 왔으면 숨겨두지 않고 과시했을 거다. 그럼 현상금 사냥꾼이군. 손안의 카드가 쉬지 않고 떨고 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카드를 모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표정 관리도 안 되나? 잃은 티가 너무 나잖아.” 헨마가 말했다. 모두를 깔보며 살아온 사람의 말투였다.

“그렇다면 좀더 재미있게 해보실까요, 나리?”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부채꼴 모양으로 카드를 펼쳤다. 추격자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판돈을 두 배로 올리시죠.”

“네놈이 그만큼 걸 돈이나 있어?” 헨마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얼마든지요.”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헨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코트 주머니에서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나리는요?”

헨마는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손짓했다.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탁자 중간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에 돈이 더해지자 구경꾼들이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지금 걸린 판돈보다 훨씬 적은 돈에도 수많은 목숨이 오갔으니까.

“네 패를 먼저 보여라.” 헨마가 말했다.

“그러죠.”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카드를 뒤집는 순간. 현상금 사냥꾼들이 움직였다.

안대를 한 남자가 올가미를 던졌다. 여자는 쌍권총을 꺼내 들며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이름을 외쳤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발로 차 탁자를 뒤집었다. 공중에서 금화, 카드, 양피지가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쌍권총이 굉음을 내며 탁자에 주먹만 한 구멍을 냈다. 딸각 올가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연기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비명이 잦아들고 연기가 걷혔을 때는 이미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사라진 후였다. 카드와 종이쪼가리 사이에서 사람들은 금화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헨마가 벌떡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서진 탁자 조각 사이로 손을 뒤적이던 헨마가 창백한 분노 속에서 외쳤다.

“돈. 내 돈! 어디 갔어. 내 돈!”

어지럽게 흔들리는 행운 도박장의 빛 속에서 다섯 장의 카드가 펄럭이며 헨마 앞에 떨어졌다.

이기는 패였다.

 

단편소설

 

더블 다운

반짝이는 행운 도박장에서 사람들은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부러움과 대리만족감도 있었지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빈털터리가 되기를 심술궂게 바라는 마음 또한 컸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올가미가 목을 서서히 죄어오는 것처럼 이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카드들이 경고하듯 파르르 떨렸다. 누군지 몰라도 추격자가 바짝 쫓아왔단 뜻이다. 어서 판을 접고 떠야 한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박살낼 기회를 놓치기는 너무 아까웠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상대를 향해 활짝 핀 꽃처럼 웃어 보였다. 광부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돈을 벌어들인 상인, 헨마였다. 헨마는 프렐요드 모피, 수제가죽, 빌지워터의 바다 부적 등 아주 비싼 것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또한, 손에는 평범한 사람은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든 값어치의 금반지를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뽐내듯 끼고 있었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금은보화와 문서 더미 위로 수제 파이프의 향긋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상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헨마님 차례인 걸로 아는데요.”

“이 쥐새끼 같은 놈, 규칙은 나도 알아.” 헨마가 말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문신이 새겨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카드 뒷면에 소용돌이 모양을 끝없이 그려댔다. “화려한 손재주로 주의를 끄는 건가? 나한테 뭔가 얻어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끌다뇨?” 트위스티드는 자신감 있고 세련된 몸짓으로 말했다. “맹세컨대 그런 저급한 수를 쓸 정도로 비열하진 않습니다.”

“아니라고? 근데 왜 자꾸 눈을 굴리는 거지?” 헨마가 연기를 내뿜으며 손을 저었다. “똑똑히 들어. 나는 최고의 꾼들을 상대해왔다. 네놈들의 표정만 봐도 무슨 속셈인지 다 알아.”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빈정거리며 카드를 섞었다. “나리가 예리하시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리곤 모자를 벗어 연극배우처럼 인사를 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눈은 군중들 위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늘 그렇듯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었다. 카드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떨렸다. 입안에서 구역질이 날 것처럼 쓴맛이 났다. 이건 곧 소동이 일어날 신호다.

도박장 한 구석, 안대를 한 남자와 붉은 머리 여자의 허리춤에 총이 얼핏 보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인가? 헨마의 재산을 지키는 자들인가? 헨마가 부하들을 데리고 왔으면 숨겨두지 않고 과시했을 거다. 그럼 현상금 사냥꾼이군. 손안의 카드가 쉬지 않고 떨고 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카드를 모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표정 관리도 안 되나? 잃은 티가 너무 나잖아.” 헨마가 말했다. 모두를 깔보며 살아온 사람의 말투였다.

“그렇다면 좀더 재미있게 해보실까요, 나리?”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부채꼴 모양으로 카드를 펼쳤다. 추격자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판돈을 두 배로 올리시죠.”

“네놈이 그만큼 걸 돈이나 있어?” 헨마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얼마든지요.”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헨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코트 주머니에서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나리는요?”

헨마는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손짓했다.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탁자 중간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에 돈이 더해지자 구경꾼들이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지금 걸린 판돈보다 훨씬 적은 돈에도 수많은 목숨이 오갔으니까.

“네 패를 먼저 보여라.” 헨마가 말했다.

“그러죠.”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카드를 뒤집는 순간. 현상금 사냥꾼들이 움직였다.

안대를 한 남자가 올가미를 던졌다. 여자는 쌍권총을 꺼내 들며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이름을 외쳤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발로 차 탁자를 뒤집었다. 공중에서 금화, 카드, 양피지가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쌍권총이 굉음을 내며 탁자에 주먹만 한 구멍을 냈다. 딸각 올가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연기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비명이 잦아들고 연기가 걷혔을 때는 이미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사라진 후였다. 카드와 종이쪼가리 사이에서 사람들은 금화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헨마가 벌떡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서진 탁자 조각 사이로 손을 뒤적이던 헨마가 창백한 분노 속에서 외쳤다.

“돈. 내 돈! 어디 갔어. 내 돈!”

어지럽게 흔들리는 행운 도박장의 빛 속에서 다섯 장의 카드가 펄럭이며 헨마 앞에 떨어졌다.

이기는 패였다.

 


데마시아의 힘 가렌 배경이야기

 

가렌과 그의 여동생 럭스는 지체 높은 크라운가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가렌은 언젠가 자신도 목숨을 다해 데마시아 왕위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군 장교로서 화려한 전공을 세운 아버지 피테르와 불굴의 선봉대 검대장이었던 고모 티아나는 국왕 자르반 3세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고, 사람들은 언젠가 가렌 역시 왕자 자르반 4세를 섬기게 되리라 믿었다.

룬 전쟁 이후 세워진 데마시아 왕국은 건국 이후 수 세기 동안 온갖 갈등과 불화로 몸살을 앓았다. 데마시아군의 정예 기사였던 가렌의 숙부는 어린 가렌과 럭스에게 성벽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바깥세상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성벽이 없으면 백성들을 지킬 수 없다고 숙부는 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어떤 존재가 비교적 평화로운 이 시기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존재가 추방된 마법사일지, 심연에서 기어 나온 피조물일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의 존재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숙부는 전투 중에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렌이 11살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가렌은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어린 동생의 눈에 비친 공포를 보았다. 그리고 맹세했다. 마법이야말로 데마시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며, 다시는 마법이 데마시아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확고부동한 긍지를 가지고 데마시아의 이념을 철저히 따라야만 마법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12살이 되던 해, 가렌은 하이 실버미어의 크라운가드 저택을 떠나 군에 입대했다. 수습 기사로 군 생활을 시작한 가렌은 밤낮없이 훈련과 전술 연구에 매진했다. 시간이 갈수록 가렌의 정신과 육체는 데마시아산 강철로 만든 무기처럼 날카롭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주군이 될 왕자 자르반 4세를 만났다. 급속도로 친해진 두 사람은 곧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수년간 가렌은 데마시아의 전사이자 방벽 부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전장을 휘저으며 활약하던 가렌은 곧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18살이 되던 해, 가렌은 프렐요드 국경을 향한 출정에 참여했다. 이때 가렌은 침묵의 숲에서 부패한 광신자들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화이트록의 용맹한 수호자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국왕 자르반 3세는 가렌이 속한 부대를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로 소환했다. 용기의 전당에서 모든 궁정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그 공을 치하하려는 생각이었다. 근래에 대원수 자리에 오른 티아나 크라운가드는 그 자리에서 불굴의 선봉대 선발 시험에 자신의 조카를 추천했다.

가렌은 시험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여동생 럭스, 그리고 영지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가렌을 반겨 주었다. 지적이고 역량 있는 여성으로 자란 동생을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가렌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럭스에게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희미하게 피어올랐던 의심이 이제는 뚜렷한 불신이 되어 가렌을 괴롭혔지만, 가렌은 이내 의심을 떨쳐 냈다. '크라운가드' 가문의 일원이 숙부를 죽인 원수들과 같은 힘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용맹하고 능숙하게 시험을 치른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왕세자가 보는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럭스와 어머니는 수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빛의 사자 수도회 일원으로 왕가를 섬겼지만, 가렌은 여동생을 최대한 멀리했다. 가렌은 세상 누구보다도 동생을 사랑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마음속에 꺼림칙한 뭔가가 있었다. 만약 동생에 대한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렌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전보다 더욱 전투에 몸을 던지고 훈련에 힘을 쏟았다.

불굴의 선봉대 신임 검대장이 전사하자, 동료 선봉대원들은 가렌을 그 후임으로 추천했다. 다른 후보자는 없었다.

확고한 의지로 데마시아를 수호하는 가렌은 어떤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가렌은 데마시아 최강의 군인이자 데마시아가 추구하는 위대하고 고결한 이념 그 자체이다.

 

 


단편소설 - 전사와 할멈

늙은 마녀는 데마시아 병사의 목에 밧줄을 감아 팽팽하게 조여 맸다. 병사는 목소리를 내 보려 했지만 그건 마녀가 정한 규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한 번만 더 규칙을 어기면 마녀는 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군모를 요강으로 쓸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마녀는 계속해서 밧줄을 조이면서 기억의 덩굴이 그의 머리에서 새어 나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녀는 언제든 병사의 머리를 베어버릴 수 있었다. 허나 그러면 합당치 않을 것이다. 잿빛 피부의 점쟁이 마녀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녀에게 원칙이 없다는 말은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다. 마녀에겐 규칙이 있었다. 규칙이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분명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병사가 규칙을 어길 때까지 마녀는 자리에 앉아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이다. 그의 행복, 그의 기억, 그의 정체성까지 전부 다. 그러고 나면 댕강, 요강이 생길 것이다.

별안간 동굴 입구 언저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녀의 보초병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들려오는 두 번째, 세 번째 비명소리.

일이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묵직한 군홧발로 미끄러운 동굴 바닥 위를 한참 동안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으로 보아 포기를 모르는 자인 것 같았다. 사방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가 잠잠해지자 딱 벌어진 어깨와 수려한 용모의 남자가 맞은편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굴 속 횃불이 그의 진중하고 단호한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흉갑 위로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녀는 동굴 뒤켠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갑옷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억제하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이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널찍한 검을 손에 들고 돌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그녀가 만든 왕좌를 향해 올라왔다.

마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칼날을 치켜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길 기다리며. 제아무리 용맹한 군사라도 그 이후의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지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남자는 칼집에 검을 꽂고 자세를 낮추어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마녀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마녀와 시선을 맞대고 한참이나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옆에 목 매어 있는 병사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나를 이겨 먹으려는 수작인가? 내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려고?’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마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종되거나 버려진 자들의 기억을 먹고 사는 마녀시죠. 동네 아이들 말로는 이 동굴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하시다고요. 일명 동굴부인이라 불리시더군요.” 남자가 호기롭게 말했다.

“하! 내 진짜 별명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다니. 돌할멈. 이게 내 별명이야. 왜? 돌할멈이라 부르면 두드려 맞을까 봐 겁이라도 났나? 아부라도 떠시게?” 마녀가 켈켈거리며 웃었다.

“아닙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저 무례한 별명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남의 집에 찾아와서 주인을 모욕하면 안 되니까요.”

켈켈거리던 마녀는 남자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웃음을 멈췄다.

“그러는 넌?” 마녀가 물었다. “넌 누구냐?”

“데마시아의 크라운가드, 가렌입니다.”

“그래, 데마시아의 크라운가드 가렌. 이제부터 규칙을 설명해 주지.” 마녀가 말했다. “넌 실종된 병사를 찾으러 왔어. 맞지?”

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죽일 생각인가?” 마녀가 물었다.

“전 거짓말은 못 합니다. 오늘 당신과 나, 둘 중 한 명은 죽게 되겠죠.”

마녀가 켈켈 웃었다.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갑옷으로 무장했으니 가능할지도 모르지.” 마녀는 늙고 늙은 자신의 얼굴 옆으로 손을 올리더니 병사의 목을 맨 밧줄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도, 규칙은 지켜야 해. 규칙을 지키기도 전에 검을 휘두르면 이 밧줄을 확! 잡아당겨 버릴 거야. 그러면 전우의 목이 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테고, 넌 죽을 때까지 그 소리에 시달리겠지.”

마녀는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보였다.

가렌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마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럼, 이제 규칙을 알려주지. 만일 네 녀석에게 이 병사 놈의 머릿속에 있는 그 어떤 기억보다 달콤한 기억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게 넘겨. 그럼 이놈을 양보하지.” 마녀는 가렌의 생각을 읽기 위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만일 못하겠다면…” 밧줄을 잡은 마녀의 손에 힘이 실렸다. “우리 중 한 명이라도 계약을 어기려고 하면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무조건 대가를 치러야 해.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가렌이 말했다.

“그럼 네 얘기부터 들어보자고. 이 병사 놈의 목숨을 구하려는 이유가 뭐지? 병사 놈이라니 내가 너무 무례했나? 이름을 알면 이름을 부를 텐데 벌써 잊어버렸지 뭐야.” 마녀가 말했다.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제 부대에 합류한 지 얼마나 안 되었으니까요.” 가렌이 답했다.

마녀는 가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풋내기 녀석,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릴 적 기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렌이 말했다. “여동생과 함께 삼촌의 등에 탔던 기억입니다. 삼촌은 녹서스의 용 사냥개처럼 짖는 흉내를 내셨죠.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웃었습니다. 좋은 기억입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벌인 그 이후의 일 따위엔 전혀 물들지 않은 기억이죠.”

마녀가 쭈글쭈글한 눈꺼풀을 긁었다.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군.” 마녀가 말했다. “내가 즐거운 기억을 원하는 줄 아나?” 마녀는 목 매인 병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그의 머리에서 자신의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기억 줄기를 음미했다. “난 모든 것이 들어있는 기억을 원해. 고통, 혼란, 분노. 난 그런 기억을 먹을 때 회춘하거든.”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주름진 볼을 훑으며 마녀가 웃었다.

“그럼 삼촌의 부고를 받고 슬퍼했던 기억을 드리죠.” 가렌이 말했다.

“그것도 별로야. 참 재미없는 친구로군.” 마녀가 밧줄을 더 팽팽하게 당겼다.

그 때 가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마녀는 무모한 젊은 전사를 죽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가렌은 마녀를 공격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칼날 끝이 마녀의 복부를 향하도록 마녀의 무릎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제 머릿속을 뒤져 보시죠. 원하시는 기억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전 아직 젊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당신이 좋아할 만한 상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 이상의 기억을 가져가시면 이 검이 당신을 찌를 겁니다. 그러나 단 하나뿐이라면 어떤 기억이든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마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 고작 제 기억 하나가 평생에 걸쳐 쌓은 동료의 기억보다 나을 거라고?

이 젊은이의 용기, 그리고 무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마녀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몸을 숙이고 가렌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의 기억을 한 겹씩 벗겨냈다.

백석 전투에서의 승리가 보였다. 상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맛본 라이어버크 고기의 풍미가 입속을 감돌았다. 브래시모어 들판에서 숨을 거둔 전우를 붙들고 오열하던 때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동생이 보였다.

동생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껴졌지만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두려움? 불쾌함? 아니면 불안감?

마녀는 가렌의 의식 속 기억을 지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기억을 골라내며, 함박미소를 짓는 금발 머리 소녀와 관련 없는 생각은 모두 옆으로 치워 버렸다. 갑옷 때문에 그 과정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기억을 골라냈다.

한참을 골라낸 끝에 어린 시절의 기억에 당도했다. 남매는 작은 인형을 갖고 놀고 있었다. 가렌의 군인 인형이 동생의 마법사 인형을 죽일 기세로 좇고 있었다. 동생은 가렌에게 불공평하다고 투덜댔다. 마법사 인형이라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면서. 가렌은 비웃으며 군인 인형으로 마법사 인형을 넘어뜨리고 옆으로 치워 버렸다. 화가 난 동생은 소리를 지르더니 손가락 끝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렌은 눈이 부시고, 혼란스럽고, 또 무서웠다. 어머니가 와서 동생을 데려가긴 했지만 방을 나서기 전 동생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없던 일로 해 달라고 간청했다. 진짜가 아니라 장난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가렌은 넋 나간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장난일 뿐이다. 동생은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사일 리가 없다. 가렌은 무의식 속 깊은 곳으로 기억을 숨겨 버렸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녀는 비슷한 기억을 계속해서 찾아냈다. 모두 하나같이 눈 부신 빛이 쏟아지며 끝이 났다.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사랑과 공포, 부정과 분노, 배신감과 보호 심리가 뒤섞인 불협화음 같은 감정이 묻혀 있었다.

가렌의 말이 맞았다. 좋은 기억이었다. 목 매인 병사의 기억을 모두 합쳐도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마녀는 미소를 지었다. 가렌이 그녀의 복부를 향해 검을 올려놓은 것은 똑똑한 처사였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빼앗긴 기억은 그 존재조차 망각되므로 원하는 만큼 기억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뻗으며 마녀는 빛의 소녀와 관련된 기억을 찾아 가렌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을 골라낸 후에야 가렌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왔다.

“좋아.” 마녀가 눈을 뜨며 말했다. “이거면 되겠어.” 마녀가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거래는 성사됐어. 하나의 생명을 위한 하나의 기억. 이제 이놈을 데리고 당장 나가.”

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 매인 병사에게로 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병사를 일으켜 세우고 마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동굴 밖으로 뒷걸음질 치며 걸었다.

‘별난 놈. 내가 계약을 어길까 봐 걱정되나 보군. 이미 어긴 줄도 모르고.’

불현듯 가렌이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부축하고 있던 동료에게서 손을 떼고 순식간에 진격해 왔다. 시선은 그녀의 두 눈에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도발에 마녀는 전율을 느꼈다. 가렌은 너무 크고, 너무 굼뜨고, 너무 느려서 거추장스러운 검을 겨누기도 전에 그녀의 공격을 받을 것이었다. 가렌의 기억에 목마른 마녀는 손가락 끝에서 어둠의 에너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네 눈에선 수년에 걸쳐 모인 감미로운 기억들이 보여.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내가 전부 마셔 버…’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녀의 몸속에서 느껴졌다. 쇠였다. 가렌의 갑옷에서 풍겨오던 시큼한 악취가 종전보다 더 진하게 그녀의 기도를 타고 올라왔다.

마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꽂힌 가렌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희미해진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가렌의 갑옷 위로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녀석은 생각보다 빨랐다.

“무슨 짓이야?” 입안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 불분명한 발음으로 마녀가 물었다.

“계약을 어기셨습니다.” 가렌이 답했다.

지저분해진 이를 드러내며 마녀가 미소 지었다. “어떻게 알았나?”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짐을 덜어낸 듯이.” 가렌이 답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돌려주십시오.”

차가운 동굴 바닥 위의 진흙에 피가 섞이는 동안 마녀는 생각에 잠겼다.

가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억을 되돌려 놓으며 마녀는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가렌은 고통 속에서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었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녀는 그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의 지친 두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녀석이었다.

“애초에 거래는 왜 한 거야?” 마녀가 물었다. “생각보다 세던데. 훨씬 더 세던데. 밧줄이고 뭐고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전에 나를 산산조각 낼 수 있었을 텐데. 머릿속은 보여줄 필요도 없었잖아?”

“남의 집에 와서 기회도 주지 않고 피부터 흘리게 하면… 무례하기 때문이죠.”

마녀가 켈켈거리며 웃었다.

“그게 데마시아의 규칙인가?”

“제 규칙입니다.” 가렌이 말했다. 그리고 마녀의 가슴에서 검을 빼냈다. 상처가 드러나며 피가 흘러나왔고, 마녀는 쓰러지자마자 숨을 거뒀다.

가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우를 일으켜 세워 데마시아로 돌아가는 먼 길을 떠났다.

‘규칙이 없다면…’ 가렌은 생각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데마시아를 위하여 그레이엄 맥닐

'이 머나먼 북쪽 땅, 포스배로우에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였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7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오빠 가렌이 훈련 차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럭스와 나머지 가족들은 증조부 포시안의 묘지에 참배를 하기 위해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묘지로 향하는 숲속 길은 끝도 없이 구불구불했고 양옆은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협곡이었다. 게다가 쉴새 없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럭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럭스는 증조부의 묘지가 용기의 전당 같은 웅장한 대리석 건물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을 배경으로 풀 덮인 봉분이 달랑 하나 솟아 있는 광경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봉분 앞에 세운 대리석 묘비에는 럭스의 증조부가 왜 전설 속 영웅인지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포시안은 절벽에서 내려온 악마와 싸웠고,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듯한 무시무시한 악마의 시커먼 심장에 데마시아의 검을 찔러넣어 치명상을 입혔다.

그때도 비가 내렸고,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북쪽의 폭우가 짐승의 송곳니처럼 뾰족뾰족한, 데마시아와 프렐요드를 가르는 산맥을 적셨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일어난 폭풍우가 봉우리 반대편에서 넘어와, 혹독한 바람에 줄기가 구부러진 데마시아의 파릇파릇한 소나무 숲을 덮쳤다. 서쪽과 동쪽에 솟은 산맥은 푸르스름한 안개에 싸여 윤곽이 희미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자못 위협적이어서, 오빠가 화를 낼 때의 분위기가 생각났다. 북쪽은 나무가 무성한 고원 지대로, 험준한 바위투성이 절벽과 날카로운 각도로 패인 협곡이 가득했다. 게다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포악한 괴물과 야수가 들끓는 위험한 땅이었다.

럭스는 2주일 전에 데마시아를 떠나 에데사로, 다시 피나라와 리서스를 거쳐 벨로루스를 지나 칼날부리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 도착했다. 기사의 바위 아래에 자리 잡은 집에서 가족과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말을 몰아 데마시아의 북서쪽 국경 지대로 들어섰다. 마치 깃대에서 깃발이 찢어져 나가듯, 데마시아의 중심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옥한 땅이 완만한 구릉 지대를 이루던 평원은 가시금작화와 엉겅퀴 덤불만 드문드문한, 바람이 몰아치는 척박한 땅으로 바뀌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구름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은색날개 칼날부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내는 새된 울음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프렐요드의 두껍디두꺼운 얼음이 내뿜는 냉기를 실은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도중에 만나는 정착지의 방어벽은 점점 더 높아졌다. 포스배로우까지의 여정은 길었고 또 피곤했다. 하지만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럭스는 짧게나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곧 사원에 들어갈 거야, 불꽃별이." 그녀는 타고 있는 말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거기 가면 따뜻한 마구간에서 곡물을 먹을 수 있어. 약속할게."

먼 길에 피곤해진 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코를 힝힝거리더니, 조급하게 발을 굴러댔다. 럭스는 박차를 가해 바퀴 자국이 깊이 패인 도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포스배로우의 정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포스배로우는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뱀자리강 강변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강물은 세찬 기세로 산맥을 지나 서쪽 해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매끈매끈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도시의 성벽이 산을 따라 늘어섰고, 성벽 안에는 돌과 잘 건조시킨 목재로 만들고 암녹색 기와로 지붕을 덮은 건물이 즐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은 동쪽에 우뚝 솟은 첨탑이었다. 어스름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탑 안에 피워놓은 화로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럭스는 파란 망토의 후드를 젖히고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황금빛 긴 머리카락이 젊음이 넘치는 고귀한 얼굴을 감쌌다. 바다처럼 파란 눈은 단호한 의지를 담고 반짝였다. 럭스는 안장에 지팡이를 묶어두었던 가죽 끈을 풀고, 황금과 흑단으로 만든 지팡이 자루를 가볍게 잡았다. 테두리를 강철로 두른 정문 위 감시 망루에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물푸레나무와 주목나무로 만든 강력한 장궁을 들고 있었다.

"멈춰라, 여행객이여." 경비대원 하나가 말했다. "성문은 내일 아침에나 열릴 거다."

"내 이름은 럭산나 크라운가드입니다." 럭스가 말했다. "늦었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 증조부께 예를 표하고 싶어 이렇게 먼 길을 왔답니다. 그러니 들여보내 준다면 고맙겠어요."

남자는 눈을 찡그려 뜨고 어둠 속 럭스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그녀를 알아보고는 휘둥그레졌다. 럭스는 포스배로우에 오지 않은 지 꽤 되었으나, 가렌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럭스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레이디 크라운가드 아니십니까!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외치고는 성벽 아래쪽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성문을 열어라."

럭스는 불꽃별이를 앞으로 몰았다. 묵직한 강철 사슬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단단한 목재로 만든 성문을 감시 망루 안으로 들어 올렸다. 럭스가 열린 성문을 통과하자 의장대 열 명이 황망히 뛰쳐나와 그녀를 맞았다. 가죽 흉갑 위에 날개 달린 검 모양의 은핀으로 여민 파란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모두 긍지 가득한 데마시아 군인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어깨는 축 늘어졌고 눈빛은 기진맥진했다.

"포스배로우에 잘 오셨습니다." 아까 망루에서 내려다보던 경비대원이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께서 오신 걸 알면 지젤 치안판사님도 안도하실 겁니다. 치안판사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호위대를 편성하겠습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할게요." 럭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가 왜 '안도'라는 표현을 썼는지 의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에서 묵기로 퍼닐 님과 미리 약속해 두었어요."

럭스는 말을 몰아 가려다가, 경비대원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낌새를 채고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크라운가드 님..." 경비대원이 말했다. “...저희의 악몽을 끝내 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빛의 인도자 사원은 따뜻하고 쾌적했다. 럭스는 불꽃별이를 마구간에 넣어준 다음 본관에서 퍼닐 여사제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포스배로우 부근의 숲과 협곡에 어둠의 마법이 깃들었다는 소문은 데마시아 수도에 자리한 빛의 인도자 사원에도 전해졌다. 그래서 광휘단의 카히나가 럭스에게 조사를 청한 것이었다.

럭스는 도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암암히 흐르는 어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은 존재가 줄곧 지켜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마주친 주민 몇 명은 피로에 젖은 기색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포스배로우 전체에 두려움이 짙은 먹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게다가 럭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다.

"지젤 치안판사 님의 아드님도요." 퍼닐이 말했다. 아마빛깔 머리카락에 빛의 인도자 치료사가 입는 희끄무레한 로브를 걸친 여성이었다.

"아드님이 왜요?" 럭스가 물었다.

"이틀 전에 실종되었어요. 어둠의 마법사가 뭔가 끔찍한 목적 때문에 그 아이를 납치해 갔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나요?”

“그 질문은...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 퍼닐이 말했다.


럭스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머릿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악몽 속에서 짐승의 발톱 같은 갈고리가 럭스의 몸을 땅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진흙이 입속을 가득 채웠으며, 어둠이 그녀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악몽의 마지막 잔상을 몰아냈다. 눈 한 켠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르 물러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입속에서 썩은 우유 맛이 났다. 마법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럭스는 손바닥에 광채를 피워올렸다. 빛이 방 안을 밝히면서 질기게 남아 있던 악몽의 흔적이 사라졌다. 럭스의 온몸에 따스함이 번져나갔다. 익숙한 진줏빛 광휘가 그녀의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사라졌고, 이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덧문을 닫아놓은 창으로 비어져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뿐이었다. 럭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마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환상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조금 전 꾸었던 악몽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시큼한 악취가 진동하는 숨결을 내뿜으며 온몸을 짓누르던 얼굴 없는 어둠뿐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럭스는 얼른 옷을 꿰입고 방구석에 세워놓았던 지팡이를 들었다. 사원 주방으로 내려온 그녀는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빵과 치즈로 아침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 안에 무덤 속 흙 같은 맛이 퍼지는 바람에 접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이제 답을 아시겠죠?" 퍼닐이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와 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퍼닐의 눈 밑은 수면 부족으로 자줏빛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어젯밤에는 난로 불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르께한 피부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이제야 럭스는 퍼닐이 생기 하나 없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꿈을 꾸셨나요?” 럭스가 물었다.

“남에게 털어놓고 위안을 얻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꿈이죠."

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전체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럭스가 마구간에 들어서자 불꽃별이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양쪽 귀를 머리에 바싹 붙을 정도로 내려뜨리고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말은 럭스에게 코를 마구 비벼댔다. 럭스는 진주처럼 뽀얀 녀석의 목과 어깨를 쓸어주었다.

"너도니?" 럭스가 묻자, 녀석은 갈기를 마구 흔들었다.

럭스는 얼른 말에 안장을 얹고 포스배로우의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동이 튼 지도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도시는 여전히 아침의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빵집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풍기지 않았으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뚱한 표정의 상인 몇 명만이 느릿느릿 가게 문을 여는 중이었다. 데마시아 인은 규율에 충실하고 근면성실한 사람들이었기에, 국경 지대 도시가 이렇게 하루를 늦게 시작하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럭스가 보냈던 것과 같은 밤을 보냈다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럭스는 성문을 통과하여 널찍한 들판으로 나갔고, 불꽃별이의 근육이 풀릴 때까지 달리게 해준 다음 진흙투성이 도로로 들어섰다. 불꽃별이는 오래전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으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녀석, 너무 용쓰지 마." 럭스는 숲으로 들어서며 한마디 했다.

소나무와 들꽃의 향이 공기 중에 차올랐다. 럭스는 북쪽 지역 특유의 그 강렬한 자연의 향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울창한 나뭇잎 지붕 틈새로 비스듬한 햇살 줄기가 내려꽂혔다. 젖은 흙냄새 때문에 잠시 지난 밤 악몽이 떠오르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럭스는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은 구불구불거리며 북쪽으로 이어졌다. 럭스는 한 손을 들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 줄기로 뻗었다. 햇살이 닿자 그녀 몸속의 마법이 요동쳤다. 럭스는 내면의 빛이 영약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마법의 힘이 오감을 가득 채우자 그녀 주변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숲의 온갖 빛깔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지며 생명력으로 충만해졌다. 빛이 눈 부신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나무의 숨결 속으로, 땅이 내쉬는 탄성 속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흐르는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냘픈 풀잎 한 줄기에서부터 강철처럼 올곧은 자작나무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이 세계의 심장에 닿아 있다는 모든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숲속을 달린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럭스의 기억이 맞다면 동쪽으로 가는 길은 나무꾼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이어졌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매장량 많은 은광을 둘러싼 정착지로 이어졌다. 럭스의 아버지가 그 은광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럭스가 제일 좋아하는 망토 핀도 그 은광의 깊숙한 갱도에서 캐낸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두 길 사이에는 좁다란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말을 타든 걷든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아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럭스가 7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저 길로 들어서지 않는 거지?' 사실 럭스가 그 길을 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증조부의 묘지에 예를 표하러 왔다는 말은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었다. 럭스는 눈을 질끈 감고 양팔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마법의 힘이 손가락과 지팡이 끝에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고, 숲속의 빛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 속에는 빛과 그림자의 상반된 어조가 뒤섞였고, 섬광 같은 색깔과 강렬한 빛이 혼재했다. 럭스는 아득한 저편의 별빛,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적시던 빛이 안개처럼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데마시아의 빛이 어둠 속으로 떨어질 때, 럭스는 움찔했다. 데마시아의 빛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내리는 순간, 럭스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안장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온몸의 감각이 다른 필멸의 존재들을 넘어 멀리까지 뻗어 나가며, 저주처럼 이 땅에 파고들어 있는 힘을 찾아 나섰다. 해는 이제 거의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다. 럭스는 숲속의 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그림자도 깃들지 못하는 곳에 깃들어 있는 그림자가 느껴졌다. 빛만이 존재해야 하는 곳에 어둠이 숨어 있었다. 숨이 콱 막히면서 누가 움켜쥐기라도 한 듯 목이 갑갑해졌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면서 무겁게 내리눌렸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깨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숲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고, 살랑거리던 풀잎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은색날개 칼날부리들도 침묵을 지켰고, 동물들이 내던 소리도 사라졌다. 수의를 단단하게 여밀 때 나는 듯한, 사그락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잠들어라...

"싫어." 럭스는 힘주어 말하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권태가 그녀의 온몸을 보드라운 담요처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럭스의 머리가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리고 눈이 감겼다.

갑자기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와 금속이 긁히며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럭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차디찬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허파에 스며드는 냉기에 다시 한 번 졸음이 날아갔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그림자의 잔상을 몰아내고 몸에 들어온 차디찬 공기가 내면의 마법을 일깨우도록 기다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굴레가 잘랑거리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짤깍거렸다.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네 명이고,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럭스는 두렵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특히 사람이라면 더욱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은 이 숲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어둠이 훨씬 더 생생하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 힘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그 능력은 마치 사람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듯했다. 럭스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당겨, 다가오는 사람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렐요드 사람들일까?' 하지만 이곳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프렐요드의 약탈자들이 여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산악지대 요새가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럭스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 무법자들?' 그렇다면 럭스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럭스는 언제라도 강력한 빛을 쏘아낼 수 있도록, 마법을 손으로 집중시켰다.

앞쪽의 나뭇잎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말을 탄 사람 다섯 명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방어구로 감싼, 완벽하게 전투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타고 있는 말은 하나같이 가슴팍이 떡 벌어진 회색 준마에 키는 180센티미터가 족히 넘어 보였고, 짙은 파란색 천으로 호화롭게 치장을 했다. 다섯 명 중 넷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자루가 금으로 된 검을 파란색 칼집에 넣어 등에 메고 있었다.

“럭산나?” 남자가 말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때문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남자가 투구를 벗고 짙은 빛깔의 머리칼과 화강암으로 깎아놓은 듯한 얼굴을 드러내자, 럭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데마시아의 정신을 형상화해 놓은 듯한 생김새여서, 왜 데마시아가 아직도 그 얼굴을 동전에 새겨넣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가렌 오빠." 럭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들은 럭스의 오빠와,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었다.

부대라고 하기에 네 명은 너무나 적은 숫자이지만, 불굴의 선봉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영웅이자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날에는 갖가지 무용담이 깃들어 있었고, 그들의 용맹은 데마시아 방방곡곡의 술집과 난로 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로 전해졌다.

검은 머리칼과 예리한 눈매, 수염을 기른 남자는 디아도로라는 검사로, 혼자서 꼬박 하루 동안 무장한 트리파르 군단을 상대로 애도의 성문을 지켰던 일화로 유명했다. 그 옆의 남자는 잔델의 사바토르라는 이름으로, 100년마다 한 번씩 깨어나 피의 향연을 즐기는 흉측한 용지렁이를 처치한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덕분에 용지렁이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놈의 송곳니는 지금 자르반 왕의 알현실에 걸려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아들과 정체불명의 여인이 함께 가져온 용의 해골이 걸려 있었다.

사바토르보다 체격은 작지만 위압감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 쪽은 바리야라는 여전사로, 던홀드에서 바다늑대 함대 습격 작전을 지휘했다. 바리야는 놈들의 배를 불태우고 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광전사 우두머리를 베었다. 바리야의 쌍둥이 형제인 로디안은 먼 북쪽 프렐요드의 항구인 프로스텔드까지 배를 타고 나아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와 행패를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럭스는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 식탁에서 그들의 무용담을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력이 났다. 물론 그들은 데마시아의 영웅이었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바토르가 용지렁이의 목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거나, 바리야가 쪼개진 노로 그렐몬을 후려쳐 죽였다는 얘기는 열 번도 넘게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럭스와 불굴의 선봉대는 포스배로우로 향했고, 가렌은 여동생과 나란히 말을 몰았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니며 행방불명된 치안판사의 아들의 행적과 더불어 무언가 사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하기야 이토록 요란하게 행차했으니 그 어떤 악마의 종복이라도 일찌감치 달아나 어디론가 숨어버렸을 것이었다. 묵직한 갑옷을 걸친 다섯 명의 전사가 기척 없이 돌아다니기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으니까. 럭스 또한 마법의 힘이 돕지 않았더라면 아까 갈림길에서 어둠의 힘이 덮쳐드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너 진짜로 포시안 증조부님의 무덤에 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랬지." 가렌이 대꾸했다. "놀랍지는 않은데, 어머니께서 네가 전에는 여기 오는 걸 싫어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서."

"어머니가 별 걸 다 기억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고귀하신 럭산나 크라운가드께서 무언가를 안 좋아하시면 하늘은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퍼붓고, 숲속 동물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지 않던가?"

"내가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 같다는 소린데."

"전에는 그랬잖아." 가렌은 싱긋 웃었지만, 말 속의 뼈를 다 감추지는 못했다. "네가 무슨 일을 벌이면 그 뒷수습을 하는 건 내 몫이었지. 어머니께선 항상,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럭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절대 오빠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사람들은 가렌이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이며 전술과 계략에 밝은 건 전쟁터에서만 그럴 뿐이라고 여겼다. 가렌이 예민하다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럭스는 그것이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렌이 저돌적인 전사라는 것은 옳았다. 하지만 저돌적이라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오빠는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럭스가 물었다.

가렌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굳이 말하라면, 그냥 가출한 것 같은데. 아니면 모험이라도 떠났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거겠지."

"어둠의 마법이 그 아이를 납치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그것도 가능한 얘기지만, 바리야와 로디안이 불과 반 년 전에 여길 지나갔었는데 수상한 마법 같은 건 찾아내지 못했어."

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배로우에서 하룻밤 자고 왔어?"

"아니." 가렌이 대답했다. 그들은 도시가 보이는 쪽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저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사바토르가 일몰의 햇빛을 가리느라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말했다.

가렌의 시선이 부하가 말하는 곳으로 향하더니,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몸가짐도 일순간에 달라졌다. 온몸의 근육이 당장이라도 무슨 행동을 취할 듯 팽팽히 긴장했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눈빛이 매서워졌다. 불굴의 선봉대는 즉각 가렌의 옆에 늘어서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럭스가 말했다.

화가 잔뜩 난 군중이 비틀비틀 걷고 있는 어떤 남자의 뒤를 따라 시장 광장으로 몰려가는 중이었다. 군중이 뭐라고 외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외침이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선봉대! 전속력으로." 가렌이 박차를 가하며 말했다.


불꽃별이도 아주 빠른 말이었지만 곡물을 먹여 키우는 데마시아의 군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럭스가 성문을 통과할 무렵, 성난 외침 소리는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불꽃별이의 옆구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말굽은 연신 자갈과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럭스는 시장 광장에 이르자 불꽃별이를 억지로 멈춰세우고는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는 데마시아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안 돼, 이건 안 돼..." 럭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경비대원 두 명이 흐느껴 우는 남자 하나를 질질 끌어 보통 때는 가축을 사고팔 때 쓰는 경매용 단 위로 데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걸친 옷은 피에 절었고, 애처로울 정도로 울부짖고 있었다. 사법관을 상징하는 흰 족제비 털로 가장자리를 두른 로브를 입고 데마시아 치안판사의 청동 날개핀을 꽂은 여자가 남자 앞에 섰다. 치안판사 지젤인 듯했다. 포스배로우 주민 수백 명이 광장을 메운 채 남자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의 증오심이 어찌나 강렬한지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럭스의 몸속에서 마법의 힘이 솟아나 피부 표면으로 올라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애써 억누르며 군중을 헤치고 남자 쪽으로 나아갔다. 가렌이 단 위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알도 다얀." 지젤 치안판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대를 살인자이자 어둠의 마법사에게 협조한 자로 부르겠다!"

"아니에요!" 남자가 울부짖었다. "당신들은 몰라요! 그것들은 괴물이었어요!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요! 놈들의 진짜 얼굴을! 어둠, 오로지 어둠뿐이었다고요!"

"어서 자백해라!" 지젤이 외쳤다.

군중이 화답하듯 소리를 질렀다. 복수를 갈망하는 먹먹한 외침이 모두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경매 단으로 돌진하여 알도 다얀의 몸뚱이를 산산조각낼 기세였다. 아니, 연단의 각 모서리에 검을 뽑아든 채 서 있는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럭스는 겨우 오빠 곁으로 와서 물었다.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단 위에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놈이 잠들어 있던 자기 아내와 아이를 죽였어. 그러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에 있던 이웃 사람들에게 도끼를 휘둘렀지. 세 명이나 희생당한 끝에 간신히 붙잡았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제야 가렌은 시선을 돌려 럭스를 보았다. "왜 그랬겠어? 이 부근에 마법사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어둠이 이 지역에 스며들어 있는 거야. 선량하고 충실한 데마시아 인을 부추겨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건 어둠을 퍼뜨리는 마법사뿐이겠지."

럭스는 잔뜩 화가 나서 쏘아붙이려다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 가렌을 밀어붙이고 계단을 올라가,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레이디 크라운가드? 왜 이러십니까?" 지젤이 말했다.

럭스는 지젤을 무시하고,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맞았는지 한쪽 눈이 부어올라 거의 감겨 있었다. 코에서는 피와 콧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내렸고, 찢어진 입술 위로는 침이 여러 줄기 늘어져 있었다.

"나를 봐요." 럭스가 말하자, 선해 보이는 남자의 눈이 럭스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기를 썼다. 흰자위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고 눈가는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어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선량한 시민 다얀이여, 왜 가족을 죽였는지 내게 말해 주세요. 왜 이웃을 습격했는지 말해 보세요." 럭스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가족, 이웃이 아니었어요. 내 눈으로 봤습니다. 놈들은... 괴물이었어요..."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둠이 덮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놈들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죽여야만 했다니까요!"

지젤 치안판사가 다가왔다. 럭스는 고개를 들었고, 치안판사의 얼굴에 영혼이 찢길 듯 괴로운 슬픔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 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치안판사는 역겹다는 눈길로 알도 다얀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네가... 우리 루카를 죽였나?"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사무쳤다. "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냐? 그 애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복수를 요구하는 외침 소리가 군중을 휩쓸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알도 다얀의 친구와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지금 당장 다얀을 죽이라며 고함을 쳤고, 진흙과 똥덩어리 몇 개가 다얀에게 날아들었다. 다얀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경비대원의 손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입가에는 침과 피가 섞인 거품이 일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니까!" 다얀은 사람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그냥 어둠이었다고. 어둠뿐이었어. 당신들 중에도 그 괴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럭스는 지젤 치안판사를 돌아보았다.

"루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젤의 얼굴에는 슬픔 외의 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럭스는 그 아래에 말 못할 수치심이 언뜻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치안판사의 눈은 충혈되었고 피로 때문에 눈가는 짙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래도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럭스가 어릴 때, 내면의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겉으로 그 힘이 드러날 때면 어머니의 눈에서 항상 보이던 그 표정이었다. 또한 오빠 가렌이, 여동생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던 그 표정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었죠?" 럭스는 다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지젤이 말했다. "아무 뜻도 없었어요."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점에서 다르죠?"

"그냥... 달라요."

럭스는 전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돌리는 상황을 겪어 보았기에, 문득 치안판사의 아들이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가렌이 말했다. 그는 단으로 올라오며 검집에서 커다란 장검을 뽑아들었다. 석양을 받아 검신이 번득였다. 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했다.

"오빠, 안 돼." 럭스가 말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이 사람하고 얘기를 좀 더 해볼게."

"그놈은 괴물이야." 가렌은 검을 돌려 어깨 위로 치켜올렸다. "악마의 종복은 아닐지 몰라도, 살인자인 건 확실해. 살인을 저지른 자가 받을 처벌은 하나뿐이지. 치안판사님?"

지젤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을 럭스에게서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도 다얀, 그대에게 유죄를 선언한다. 또한 불굴의 선봉대인 가렌 크라운가드로 하여금 데마시아의 정의를 시행할 것을 요청한다."

다얀은 고개를 쳐들었다. 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무언가 껄끄러운 감정이 다얀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속삭이는 느낌. 그 느낌은 럭스가 미처 확신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차디찬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가는 듯한 감각 때문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다얀의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정신 나간 방랑자가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목이 잔뜩 쉰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기절해 버렸다. 가렌은 검을 높이 치켜들고 사형집행인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다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형 집행을 독촉하는 군중의 고함 소리에 거의 묻혀 버렸지만, 가렌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럭스는 간신히 몇 마디를 이어맞출 수 있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다..."

"잠깐!" 럭스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가렌의 검은 이미 할 일을 다한 뒤였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얀의 몸뚱이가 풀썩 주저앉았고 피가 흘러나왔다. 무덤 구덩이에서 시커먼 즙이 흘러나오듯 연기가 그의 몸에서 나선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갑자기 머리에서는 흉측한 발톱과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눈을 지닌 망령이 튀어나왔다. 지젤 치안판사는 충격을 받고 움찔했다.

어둠의 망령은 사악하게 낄낄거리더니 치안판사에게 달려들었다. 지젤은 비명을 질렀다. 망령은 그녀의 몸을 통과하더니 바람에 재가 흩어지듯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럭스는 망령이 사라지며 남긴 숨결을 느꼈다. 그 에너지는 불쾌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감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지젤 치안판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안색은 잿빛이 되었고 극심한 공포로 흐느끼고 있었다.

럭스도 주저앉다시피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형상화된 환상이 무수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산 채로 무덤에 매장당한 갑갑함, 오빠의 손으로 데마시아에서 쫓겨나는 먹먹함, 느리고도 고통스럽게 죽는 천 가지 방법이 한꺼번에 엄습하며 숨통을 조였다. 럭스의 내면에 자리한 빛이 공포스러운 환상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럭스는 입속에 가득 찬 죽음의 맛을 침으로 뱉어냈다. 그녀의 숨결에서 빛의 입자가 희미한 빛을 냈다.

"럭스..."

가렌이 속삭이듯 말했다. 한 순간, 럭스는 미친 듯이 환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오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럭스는 울고 있는 치안판사에게서 돌아섰다. 마법의 힘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온몸을 휩쓸었다.

군중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럭스, 이게 무슨 일이지?" 가렌이 말했다.

럭스는 눈을 깜박여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끔찍스러운 환상을 쫓아냈고, 가렌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단 위로 뛰어올라와 가렌의 곁에 섰다.

그 순간,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하나씩 둘씩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갑작스레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럭스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태양은 포스배로우의 서쪽 성벽 너머로 막 사라지려는 참이었다. 럭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시커먼 수증기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상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민들의 몸뚱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똑같은 형상은 하나도 없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녹서스 갑옷을 걸친 악마,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미, 머리가 여럿 달린 뱀, 탑처럼 우뚝 솟은 몸집에 서리 도끼를 든 악마의 전사, 흑요석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입 안 가득 나 있는 거대한 비룡, 그 외에도 제정신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갖가지 끔찍스러운 형체들이었다.

“사악한 마법이군." 가렌이 단언했다.


살아 있는 그림자 같은 형체들은 단으로 다가왔다. 마치 허공 속을 미끄러지듯,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죠?" 바리야가 물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꾸었던 악몽 속에서도 가장 사악한 존재들이에요." 럭스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바토르가 물었다.

"그냥 알아요." 럭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저것들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럭스가 익힌 능력은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그리고 불굴의 선봉대는 이곳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럭스는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쥐고 길게 휘파람을 분 다음, 가렌에게로 돌아섰다.

"내가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어."

"어떻게 하려고?" 가렌이 악마들의 형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아 줘."

휘파람 소리를 들은 불꽃별이가 악마들을 뚫고 달려왔고, 럭스는 단 가장자리로 향했다. 악마들은 녀석을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 포스배로우를 엄습한 사악한 힘은 말 한 마리의 꿈과 악몽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럭스는 단에서 뛰어내리며 불꽃별이의 갈기를 붙들었고, 가뿐한 동작으로 단번에 말등에 올라탔다.

“어디 가는 거야?”가렌이 물었다.

불꽃별이는 뒷다리로 버티며 일어섰고, 럭스는 안장에 앉은 채 몸을 틀며 오빠에게 답했다.

“아까 말했잖아. 포시안 증조부님께 예를 표하러 갈 거라고!”



가렌은 여동생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쓰러진 주민들과 악몽의 형상들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악마들이 연신 발톱으로 럭스를 움켜쥐려 했지만, 그녀와 불꽃별이는 용케도 매번 공격을 피했다. 악마 군단을 벗어난 럭스는 짧은 순간 멈춰서서 황금으로 끝을 감싼 지팡이를 오빠 쪽으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불굴의 선봉대는 검으로 방패를 치며 화답했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그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럭스는 말을 돌려 다시금 전속력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가렌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곧 시작하게 될 백병전에 대비하여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는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위치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사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바리야와 로디안은 가렌의 왼쪽에,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오른편에 섰다.

"우리는 불굴의 선봉대다." 가렌은 검을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불굴의 용기와 예리한 눈으로 검을 인도하라."

맨 처음 도달한 것은 칠흑처럼 새까만 악마 사냥개들이었다. 놈들은 칼날 같은 송곳니와 번뜩이는 이빨을 내세우며 단 위로 뛰어올랐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방패를 맞대고 검을 들어 적을 맞았다. 강철 방패의 벽이 놈들을 튕겨냈다. 그림자와 악의로 만들어진 형상임에도, 적의 힘과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완강하고 포악했다. 가렌은 한 발을 딛고 나와 괴물의 허리께에 검을 찔러넣었다. 척추가 있을 법한 위치였다. 놈은 귀를 찢을 듯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폭발하더니 검은 먼지로 변했다.

가렌은 검을 후퇴시켜 비스듬히 들었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른 악마의 입속으로 찔러넣었다. 가렌이 손목을 비틀며 어깨 힘으로 검을 내리꽂자 악마는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렌은 놈의 가슴팍을 짓밟았고, 놈은 으르렁거리다가 폭발해 버렸다. 이번에는 탑처럼 거대한, 프렐요드 전사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가렌을 덮쳤다. 가렌은 검을 위로 치켜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엄청난 기세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가렌은 이를 악물며 내뱉고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그러고는 머리가 있을 법한 그림자 부분에 칼을 밀어넣듯 꽂았다. 전사의 형상이 폭발하며 어김없이 재 같은 먼지가 피어올랐고, 가렌은 곧장 검을 돌려 이번에는 다른 악마의 배를 노렸다.

사바토르는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사냥개의 목을 쳤고, 디아도로는 연신 쉬익거리는 거대한 뱀을 방패로 내리쳐 두동강이냈다. 바리야가 얼굴 형체도 없이 송곳니만 잔뜩 난 악마 전사를 칼자루로 내리치자, 쌍둥이인 로디안의 검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림자 형상의 악마들은 치명타를 입는 순간 폭발하며 재인지 먼지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렌의 검이 번뜩이더니 은빛 날이 전갈처럼 생긴 괴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전갈이 꼬리 끝 갈고리로 가렌의 머리를 노렸지만, 사바토르의 방패가 막아냈다. 곧이어 바리야의 검이 괴물의 다리를 잘라냈고, 놈은 폭발하며 사라졌다. 이제는 흉측하게 생긴 절름발이 괴물이 로디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로디안은 형체 없는 놈의 얼굴 부분에 검을 찔러넣었고, 괴물은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림자 괴물을 하나 처치할 때마다 곧장 다른 놈이 빈 자리를 메웠다.

"등 맞대기 진형!" 가렌이 외쳤다. 다음 순간 다섯 전사들의 어깨 갑옷이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불굴의 선봉대는 순식간에 등을 마주댄 원형 대열을 만들었다. 마치 어둠에 맞서는 빛의 요새 같았다.

"데마시아의 힘을 보여주리라!"


럭스는 숲속을 내달렸다. 양옆을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이 희미해 보일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벌어진 지팡이 끝에서 발산되는 빛이 오솔길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아무리 빛의 인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숲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가 맞서야 하는 악몽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악몽이라는 물을 무한정 공급하는 샘물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공포...

럭스는 바로 오늘 아침에 택했던 길을 따라 달렸다. 마법의 힘이 불꽃별이를 이끌었고, 녀석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렇게 밤의 숲길을 질주한 끝에, 럭스와 불꽃별이는 마침내 갈림길 바로 앞까지 왔다. 불꽃별이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사리가 우거져 잘 보이지도 않는 중간 길로 곧장 뛰어들었다.

증조부 포시안의 무덤으로 향하는 북쪽 길이었다.

길은 갈수록 구불거렸고, 양옆은 가파른 협곡이거나 바위투성이 경사가 이어졌다. 마법의 빛이 앞을 비춰주고 불꽃별이도 자신만만했음에도, 럭스는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무덤이 가까워질수록 풍경도 변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에서는 불쾌한 느낌의 찐득한 검은 수액이 흘러내렸고, 기괴하게 비틀리고 옹이투성이인 가지들은 구부러진 갈퀴손 같은 끝으로 럭스의 머리칼과 망토를 잡아당겼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은 마치 송곳니가 늘어선 거대한 입처럼 보였고, 높직한 가지에는 독을 잔뜩 품은 거미들이 거미줄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발밑의 땅은 기묘하게 물컹거렸고, 기분 나쁜 금속 냄새가 나는 물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 있었다. 마치 숲속 요정이 가꾸다가 버린 과수원 같았다.

불꽃별이는 그림자가 가장자리를 빙 두르고 있는 공터 입구에서 멈춰섰다. 녀석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두려움에 코를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진정해." 럭스는 애마를 달랬다. "포시안 님 무덤이 바로 앞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하지만 말은 한 발짝도 더 가려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 혼자 갈게."

럭스는 말등에서 내려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공터로 들어섰다.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빛은 마치 폭풍우 속 홀로 빛나는 초롱불 같았지만, 간신히 앞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포시안의 무덤 봉분은 어둠 속에서 보니 풀이 난 야트막한 언덕 같았고, 꼭대기에는 돌을 대충 쌓아 만든 이정표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올라갔고, 고대의 공포스러운 형상들이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며 자신들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시안의 업적을 새긴 거대한 묘비는 꿈틀꿈틀거리는 검은 끈 같은 것이 휘감고 있었다.

묘비 앞에는 열두 살이나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아지경 상태에 빠진 듯, 야윈 상체가 느릿느릿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무덤에서 뻗어나와 마치 덩굴처럼 소년의 목을 휘감아 조르고 있었다.

"너, 루카니?" 럭스가 말했다.

럭스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소년의 상체가 딱 멈췄다.

소년은 럭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공허하고 시커먼 눈이 럭스를 응시했다. 럭스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소년은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다기보다는 얼굴에 틈이 생긴다고 표현해야 맞을 듯했다.

"이젠 아냐." 소년이 말했다.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날선 갈고리 같은 다리로 가렌에게 다가왔다. 불룩한 배에는 튀어나올 듯한 눈과 연신 닫았다 벌렸다 하는 입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렌은 거미의 가슴팍을 검으로 찌르는 동시에 발로 차서 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거미의 몸통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다.

가렌은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검은 발톱 하나가 어깨갑옷을 치자 어깨 근육에 뼛속까지 저린 냉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갑옷의 금속은 갈라지지 않았고, 이음매도 풀리지 않았다. 발톱은 그대로 갑옷을 통과했다. 가렌의 온몸에 소름 끼치는 역겨움이 퍼져나갔다. 코에서는 습기찬 묘지의 흙냄새가 풍겼다. 몇 백년이나 된 무덤에서 파낸 듯한 썩은 흙의 악취였다. 가렌은 늘 훈련했던 대로 그 사악한 고통을 떨쳐냈다.

그때 갈고리 검 하나가 로디안의 갑옷 아래를 파고 들며 로디안을 옆으로 거꾸러뜨렸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방패를 내려뜨렸다.

"자세 유지해!" 가렌이 소리쳤다. "고통을 떨쳐내야 한다."

로디안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림자 형상들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불굴의 선봉대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이 끝도 없이 몰려옵니다!" 바리야가 외쳤다.

"그럼 우리도 끝까지 싸울 수밖에!" 가렌이 대답했다.


럭스는 오로지 이 으스스한 공터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눈 속에서 어둠의 힘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인간의 취약한 마음을 풍부한 자양으로 삼는 악몽들이 깨어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냉정한 지적 존재가 럭스를 요모조모 평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림자들이 공터 가장자리로 모여들었다. 온갖 괴물과 공포스러운 형체들이 럭스 주변으로 몰려들며 그녀의 눈이 닿지 않는 바로 바깥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 머리통 속에 악몽이 잔뜩 들어 있구나." 소년이 말했다. "돌멩이로 네 머리를 치면 그것들을 꺼내줄 수 있겠는데."

"루카,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럭스가 말했다.

"그럼 뭔데? 네가 말해 봐."

"저 무덤 속의 악마지. 사람들이 포시안 증조부님을 매장할 때 악마도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야."

루카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양 입꼬리를 너무 치켜올린 나머지 피가 작은 개울처럼 흘러 턱으로 떨어졌다.

"그래, 죽지 않았지. 그냥 잠들었던 거야. 스스로를 치료하면서, 부활시키면서, 대비했던 거지."

"뭘 대비했다는 거야?" 럭스는 억지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소년은 쯧쯧 소리를 내더니 경고를 하듯 한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럭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래, 거기까지야." 소년은 몸을 숙여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 악몽들을 내가 꺼내줄게."

"루카..." 럭스는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말을 할 수는 있었다. 아직까지는.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넌 할 수 있어. 네 속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까. 나는 알아. 그래서 포스배로우에서 도망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악마를 물리쳤던 사람 곁에 있고 싶어서 말이야."

소년의 육신을 걸치고 있는 존재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그 웃음 소리에 주변의 풀들이 시들어 버렸다.

"요놈의 눈물이 마치 사막에서 만난 물 같았지." 소년은 앞으로 다가와 럭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두개골의 어느 쪽을 부수는 게 좋을까 가늠하기라도 하듯. "그 눈물 덕분에 내가 깨어나서 양분을 얻을 수 있었거든. 너무 오랫동안 잠들었던 바람에, 필멸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좋은 것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니까."

소년은 한 손을 뻗어 럭스의 뺨을 쓸었다. 악마의 손길이 닿는 순간, 럭스의 몸에서 서늘한 공포의 불꽃이 튀었다. 소년이 손가락을 떼자, 연기 같은 실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공포가 럭스의 전신을 덮쳤다. 럭스는 숨이 막혀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난 녀석을 잠재웠지. 그랬더니 녀석의 꿈에서 공포가 자라나 형상을 갖추었지 뭐야." 소년이 말했다. "물론 힘은 약해. 네 몸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냥 작은 불씨 수준이지. 그 정도 힘으로는 내 형상을 갖출 순 없었지만, 어린아이의 공포심은 내겐 만찬이나 다름없어.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데마시아는 이제 공포의 악몽의 세계가 될 거야. 요 꼬마나 너 같은 인간들에게 말이지."

럭스의 내면의 마법이 이 악마의 힘에 밀려났다. 어둠이 공터를 가득 채우면서, 럭스의 빛은 이제 희미한 불꽃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하지만 단 하나의 불꽃이라도 숲 전체를 집어삼키는 대화재가 될 수 있는 법.

"사람들은 요 루카라는 꼬마를 증오했지. 요놈도 그걸 알고 있었어. 너희 필멸의 존재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걸 보거나 접하면 일단 겁부터 먹거든. 그 정도 두려움이면 충분해. 그때부터는 부채질만 살살 해주면 아주 정교하고도 공포스러운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럭스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것은 그 힘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럭스는 몸속으로 파고든 공포와 멀찍이 떨어진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불꽃을 피워올렸고, 그 불꽃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조금씩 번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루카, 제발." 럭스는 안간힘을 쥐어짜내 힘겹게 말했다. "이건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그놈이 너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 꼬마놈은 네 말을 못 듣는다니까. 설령 들을 수 있다 해도 무서워서 아무 짓도 못할 걸.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요 꼬마놈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꼬마놈이 잘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것, 저 끔찍한 환상이 바로 요 꼬마놈의 작품이라는 것 말이야. 그 끔찍한 악몽을 모두들 뼈저리게 맛보지 않았나?"

럭스의 양팔에 고통이 퍼져나가더니 가슴께로 옮아갔다. 마법의 힘이 커지고 있음을 눈치챈 듯, 소년의 새까만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 두려움은 내가 너무나 잘 알아." 럭스가 말했다. "하지만 난 두려움에 굴복하진 않아."

럭스는 지팡이를 소년 쪽으로 내뻗었다. 지독한 통증 때문에 비명이 새어나왔다. 팔다리가 마치 불이 붙은 듯 아팠기에, 공격은 어설펐다. 소년은 껑충 뒤로 피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팡이 끝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뺨을 스쳤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불굴의 선봉대는 잔인할 정도로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검술과 어떤 타격도 막아내는 방패술로 전투를 이어갔지만, 그들이라고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림자 형상들이 다섯 전사들에게 가까이 다가들었다.

무기를 잔뜩 움켜쥔 사람 떼 같은 형상이 왼쪽에서 덤벼들었고, 디아도로는 놈의 몸통을 내리쳤다. 하지만 놈의 공격이 디아도로의 방패를 맞고 튕겨나오며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디아도로는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검을 들어 용의 머리가 달린 시커먼 괴물의 배에 찔러넣었다.

"정신 차려!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해치우라고!" 사바토르가 질책했다.

가렌은 일격을 맞고 몸을 뒤트는 악마의 배를 찔러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깊숙이 찔러넣고 손목을 비틀 것. 멈추지 말 것.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큼지막한 곤충 같은 머리통에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잔뜩 난 괴물이 포효했다. 가렌은 놈의 눈을 베었다. 놈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두 놈이 더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를 여유가 없었다. 한 놈을 검자루로 후려쳐 다른 놈의 가슴팍으로 밀어붙인 다음 검으로 놈의 배를 찔렀다가 빼냈다. 괴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렌은 한 발짝 물러나 바리야와 로디안과 나란히 섰다. 다들 투구에서부터 정강이받이에 이르기까지 재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여기서 이대로 싸운다." 가렌이 말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디아도로가 물었다.

가렌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숲속에서 빛 한 점이 아련히 빛나고 있었다.

"럭스에게 필요한 시간만큼." 가렌은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림자 악마들이 다시 다가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모아 루카에게 던졌다. 눈이 멀어버릴 듯 환한 빛이 폭발하며 공터를 비추었다. 소년의 몸속에 깃들었던 악마가 떨어져나왔다. 놈은 격노와 절박함에 사자후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새하얀 빛이 럭스를 감싸더니 곧이어 주변의 모든 것이 그 빛 속으로 들어갔다. 럭스의 어마어마한 힘 앞에 어둠의 악마는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그녀의 작열하는 빛 앞에서 그림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빛은 점점 커지면서 무덤 주변과 숲속을 채웠고, 그 광휘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순백의 끝없는 공간만 존재할 뿐이었다. 럭스의 앞에는 양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자세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작고 겁먹은 아이의 눈이었다.

"저를 도와주려 오셨어요?"

"그럼." 럭스는 앞으로 걸어가 소년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돌아가야 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못해요. 너무 무서워요. 저 밖에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가 있어요."

"맞아. 하지만 우리가 그 남자를 물리칠 수 있단다.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내가 널 도와주게 해준다면 말야." 럭스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알아. 사람들이 네 능력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서운 거지? 나도 너와 똑같은 일을 겪었어.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네 안에 있는 힘, 그건 사악한 게 아니야. 어둠의 마법도 아니고. 그건 빛이야. 그 빛을 통제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도와줄게.”

럭스는 한 손을 내밀었다.

“정말요?” 소년이 말했다.

“그럼, 약속할게. 넌 혼자가 아니야, 루카."

소년은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듯 럭스가 내민 손을 덥석 붙들었다.

빛이 다시 한 번 커지면서 눈이 멀 정도로 광채를 발산했다. 잠시 후 광채가 가라앉자, 공터는 럭스가 7년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봉분을 덮은 풀은 맑은 초록색이었고, 돌을 쌓은 이정표와 묘비에는 포시안의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숲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던 어둠의 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수의 발톱 같은 가지를 달고 있던 나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무들로 돌아왔고, 암청색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밤에 깨어나 사냥을 다니는 새들이 내는 소리가 나뭇잎 천정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루카는 여전히 럭스의 손을 꼭 붙든 채, 럭스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는 사라졌나요?"

"그런 거 같아." 어둠의 힘이 내뿜던 역겨운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당분간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닐 테고,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어.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루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갈 수 있단다."


온몸이 마비될 것 같은 냉기가 가렌을 엄습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팔다리에 어둠의 괴물들이 발톱을 박아넣었다. 핏속으로 들어온 얼음장 같은 기운이 심장과 영혼을 파고들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이미 쓰러졌고, 안색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로디안은 무릎을 꿇은 채 목에 갈고리발톱이 달린 그림자 손이 휘감겨 있었다. 바리야는 여전히 싸우는 중이었다. 방패를 든 손은 힘없이 옆구리에 축 처져 있었지만, 검을 든 손은 여전히 적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가렌의 입속에 재와 절망의 맛이 배어났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전사였다. 적어도 이런 패배는... 자르반 4세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에도 가렌은 싸움을 계속해야 할 의지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을 한 번 몰아쉴 때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탑처럼 거대한 그림자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둠의 도끼를 들었고,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악마였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처치했던 야만인 전사의 모습 같기도 했다. 가렌은 검을 들어 올렸다. 데마시아 전사답게 전투 함성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여름의 미풍이 불어왔다. 마치 해가 뜨기라도 하듯, 북쪽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림자 악마들은 태풍에 바짝 마른 낙엽이 날아가듯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바람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채가 마을 광장을 한바탕 휩쓸자 어둠의 그림자는 그 기세에 밀려 물러났다.

가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버텨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로디안은 허파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고, 쓰러져 있던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굴의 선봉대는 주변을 돌아보며 마지막 남은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스배로우 주민들도 정신이 들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바리야가 헐떡이며 물었다.

"럭스 덕분이지." 가렌이 말했다.


루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빛의 인도자 사원의 퍼닐에게 루카를 지도해 줄 것을 신신당부한 후, 럭스와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포스배로우의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도시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길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손에 잡힐 듯 무거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 중에 처형 이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한 남자의 죽음에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베일의 여신께서 그대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시기를." 다얀의 시신을 묻은 곳을 지날 때 럭스가 말했다.

“그자한테 그런 자비를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렌이 말했다. “그자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

"그래, 맞아. 하지만  그랬는지 오빠도 알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그놈은 범죄를 저질렀고, 합당한 대가를 치렀어.”

“당연히 중요하지. 알도 다얀은 친구이자 이웃이었어." 럭스가 말했다. "포스배로우 사람들은 주막에서 다얀과 같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만나면 농담을 주고받았어. 아들 딸들은 다얀의 아이들과 같이 놀았고 말이야. 그렇게 판결을 서두르는 바람에 왜 다얀이 그런 살인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하고 납득할 시간이 전혀 없었잖아.”

가렌은 시선을 눈 앞의 땅에 고정한 채였다.

“사람들은 이해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럭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자잘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아. 데마시아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은 야만족이 드글드글하고, 동쪽은 탐욕스러운 제국이 우릴 넘보고 있지. 게다가 어둠 마법사의 힘이 바로 우리 발밑까지 파고들어와 있다고. 우리는 만사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어. 우리의 판단에 의심이 깃든다면, 데마시아는 약해지겠지. 난 데마시아가 약해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이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론.” 가렌이 대꾸했다. "그게 내가 행동하는 이유야.”

“데마시아를 위해서?”

“데마시아를 위하여.” 가렌이 말했다.

 


럭스 광명의 소녀 - 배경이야기

럭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럭산나는 오빠 가렌과 함께 명망 높은 크라운가드 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데마시아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 자리 잡은 크라운가드 가는 대대로 국왕을 수호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럭스의 조부는 폭풍 이빨 전투에서 왕의 목숨을 구했으며, 고모인 티아나는 럭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굴의 선봉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가렌은 소년티를 막 벗었을 무렵 군에 입대해 왕위 수호의 의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했다. 가렌이 떠난 후, 가족들은 럭스가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돕길 원했다. 하지만 럭스는 어릴 때부터 그 일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럭스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탐험하고 싶었다. 데마시아의 성벽 뒤에, 그리고 국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었다. 럭스는 오빠 가렌을 우러러봤지만, 자신에게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라고 말할 때마다 가렌이 미웠다.

가정교사들은 럭스가 크라운가드 가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 일생을 바치도록 지도했다. 하지만 럭스는 그들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거나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심지어 그들도 모르는 지식을 탐구하면서 가정교사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럭스의 삶에 대한 열정과 주변 사람들마저 물들이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가정교사들은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변화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때 마법은 룬테라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고, 생존자들은 마법이 금지된 왕국, 데마시아를 건국했다. 마법의 유혹에 빠져 타락해버린 순수한 영혼들에 관한 전설은 왕국에 널리 퍼져있었다. 실제로 럭스와 가렌의 숙부도 수년 전 추방된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산맥 너머에서는 무서운 소문이 들려왔다. 세상 어딘가에서 마법이 다시 힘을 키우고 있다고...

그리고 어느 날 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럭스는 칼날늑대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럭스의 몸에서 갑자기 강력한 마법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늑대 무리를 궤멸시켰지만, 그 광경을 본 럭스는 두려움에 떨었다. 럭스의 몸에는 크라운가드 가문의 피뿐만 아니라, 데마시아가 두려워 마지않는 마법의 힘도 흐르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악한 존재인가? 감금되고 추방되어 마땅한 혐오스러운 존재인가? 공포와 의구심이 럭스를 사로잡았다. 뭐가 됐건 간에 마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크라운가드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 줄 것이 뻔했다.

가렌이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럭스는 하이 실버미어의 크라운가드 저택에 홀로 남겨질 때가 많았다. 럭스는 점차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마법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마법의 빛을 잠재우려고 애쓰며 밤을 지새우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럭스는 아무도 모르게 마법의 힘을 시험했다. 저택 마당에 내리쬐는 햇살을 조종해 고체화하기도 하고, 빛나는 작은 구체를 만들어 손에 쥐어보기도 했다. 럭스는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16살이 되던 해, 럭스는 아버지 피테르와 어머니 오가사와 함께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에 있는 관사로 갔다. 불굴의 선봉대에 입단하는 가렌을 축하할 목적이었다.

위대한 도시는 럭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도시는 그야말로 모든 백성이 한마음으로 받드는 데마시아 왕국의 숭고한 이념 그 자체였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빛의 사자 수도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궁중 행사에 참여하는 와중에, 럭스는 빛의 사자 수도회의 광휘단 소속 성기사인 카히나와 친해졌다. 카히나는 크라운가드 저택 정원에서 럭스와 함께 훈련하며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럭스가 수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럭스는 전에 몰랐던 역사를 배웠고, 좀 더 다채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데마시아의 방식 외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럭스는 조국을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데마시아가 자신과 같은 마법사들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단편소설  마지막 빛

 

새벽에 테르비시아에 지진이 닥쳤다. 땅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면서 쩍쩍 벌어지고 쪼개졌다. 럭스는 애마 불꽃별이를 몰고 무너져버린 망루의 잔해 사이를 달렸다. 사람 키의 네 배는 되는 높다란 백색 석벽이 녹서스의 공성 병기에 몇 주쯤 폭격 당한 것처럼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쓰러진 돌덩이들 틈으로 말을 조심스럽게 몰면서, 푸른색과 흰색으로 된 천막 아래에 꾸려진 임시 치료소로 향했다.

럭스가 일찍이 본 적 없는 규모의 어마어마한 재난이었다. 테르비시아의 건물들은 단단한 화강암과 데마시아산 오크나무로 되어 있었고, 여러 개의 축으로 탄탄히 떠받쳐져 드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의 대부분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온통 먼지에 뒤덮인 사람들이 생존자를 찾아내려고 곡괭이며 삽으로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지만, 그 밑에서는 시체만이 속속 발견되는 중이었다. 도시의 구획을 나누듯 땅을 이리저리 가르는 깊은 균열들 속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고, 예전의 길거리들은 그 밑으로 쑥 꺼져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치료소 앞에 도착한 럭스는 말에서 내리고 천막을 젖혔다. 그녀는 치료사는 아니었지만, 치료에 필요한 물건을 날라주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하다못해 부상자들 옆에 앉아 있기만 하더라도 도움이 될 터였다. 자신은 끔찍한 참사의 현장을 이미 보았으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마음의 각오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천막 안에 줄지어 누워 있는 부상자들은 언뜻 봐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여기저기서 통곡했고, 죽은 아내나 남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건 겁에 질린 채 멍한 눈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아수라장 틈에서 피에 젖은 앞치마를 걸친 채 백랍 물그릇에 손을 씻고 있는 의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럭스는 부리나케 그쪽으로 다가갔다.

“알자르 선생님.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그는 눈물에 젖은 퀭한 눈을 돌렸다. 경황이 없는 듯 그는 잠깐 뜸을 들이고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레이디 크라운가드.”

“럭스라고 부르세요. 어서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참혹한 일에 레이디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끌어들이다뇨.” 럭스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나는 데마시아인이에요. 같은 데마시아인끼리는 서로 도와야죠.”

“옳은 말씀이십니다.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알자르는 지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덕분에 부상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알자르는 그녀를 이끌고 치료소 안쪽으로 더 들어가, 낮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보여주었다. 럭스는 그의 부상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다 으스러지다시피 한 데다 눈에도 붕대를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걸 보니 군인인 모양이었다.

“이분은 구조 작업을 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무너진 집의 잔해에서 한 가족을 다 구출해 내고는,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을 때 하필 두 번째 지진이 일어난 거죠. 옆에 있던 다른 건물이 넘어져서 그 밑에 깔리는 바람에... 폐가 심하게 손상된 상태입니다. 눈에는 유리가 들어갔고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요?” 럭스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만이 아실 일입니다만, 얼마 못 견딜 겁니다. 레이디께서 그의 곁을 지켜주세요. 그러면 베일의 여신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죽어가는 부상자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 메어왔다. 알자르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살 가망이 있는 환자들을 돌보러 떠났다.

“너무 어두워요.” 럭스의 손길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말했다. “맙소사, 아무것도 안 보여!”

“진정해요, 병사. 이름이 뭐지요?” 럭스가 물었다.

“도슨입니다.” 그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던홀드를 구한 영웅의 이름이로군요.”

“예. 아시나 보죠? 옛날에 야만인들하고 싸웠던 사람인데.”

“그럼요, 알다마다요.” 럭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오빠가 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거든요. 같이 전쟁 놀이도 한 걸요. 오빠는 나한테 억지로 프렐요드 해적 역을 시키고, 자기는 도슨 역을 맡았어요. 혼자서 형상변환자들을 물리치고 항구를 지켜냈다는 영웅 이야기가 무척 멋있게 느껴졌던 거겠죠.”

“나도 그 영웅처럼 되고 싶었어요.” 남자가 희미하게 낮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붕대에서 피가 흘러나와 마치 붉은 눈물처럼 보였다. “내 이름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럭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살았어요. 알자르 선생님에게 이야기 다 전해 들었어요. 당신은 데마시아의 진정한 영웅이에요.”

도슨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지더니,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력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왜 아무것도 안 보이죠?”

“당신 눈이...” 럭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눈이... 어떻게 됐는데요?”

“알자르 선생님 말로는, 눈에 유리 파편이 들어갔대요.”

도슨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나는 이제 곧 죽잖아요. 죽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난 마지막으로, 데마시아의... 빛을 보고 싶었...”

도슨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그렇게 말끝을 흐린 순간, 럭스의 안에서 마법의 힘이 꿈틀거리며 고동쳤다. 그녀는 빛의 사자들에게서 배운 대로 주문을 외워서 일단 그 힘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억눌렀다. 그녀는 오랜 세월 훈련을 통해 자기 힘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지금처럼 감정이 격해지면 에너지를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슨의 눈에 감긴 피투성이 붕대에 손을 얹고, 반짝이는 빛의 마법을 손끝으로 내보냈다. 빛은 그의 다친 눈 너머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당신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해줄 수 있어요.”

그녀의 손을 잡아 쥔 도슨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도슨은 자신의 안에 비쳐드는 데마시아의 햇살을 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그가 속삭였다.

 


갈리오배경이야기

위대한 석상

갈리오의 전설은 룬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피난민이 마법의 힘을 피해 도망치면서 시작되었다. 발로란 서부, 고향을 잃은 피난민 무리 하나가 사악한 흑마법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며칠에 걸친 추격을 피하느라 지친 피난민들은 고대 석화림에 숨어들었고, 그들을 쫓던 흑마법사들은 그곳에서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석화된 나무들이 자연적으로 마력을 억제해 석화림 안에서는 마법이 무용지물이었다. 이를 알아챈 피난민들은 무기를 들고 그 숲에서 흑마법사들을 몰아냈다.

마법을 억제하는 그 숲을 두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힘든 여정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새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이견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착민들은 숲을 이용해 마법에 대항할 장비를 제작했고, 나중에는 나무에 재와 석회를 혼합해 페트리사이트라는 강력한 항마 물질을 만들어냈다. 새로 태어날 문명의 기반이자 데마시아 왕국의 성벽이 될 신물질의 탄생이었다.

이후 수년간 데마시아인들은 왕국의 영토를 둘러싼 페트리사이트 성벽 덕분에 마법의 위험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었다. 종종 국경 외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면 용맹한 데마시아군이 활약했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든 항마석 성벽의 마법 차단 능력을 전투에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조각가 듀란드는 페트리사이트를 이용해 데마시아군을 위한 마법 방어 장치를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2년 뒤 자신의 걸작을 공개했다. 그것은 갈리오라는 이름의 날개 달린 동상이었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갈리오는 왕국 방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발로란 대륙 전역에서 데마시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갈리오를 전장에 끌고 가려면 도르래와 강철 썰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황소가 필요했다. 거대한 페트리사이트 석상은 경외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많은 적은 갈리오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마법을 먹어치우는' 거석상 갈리오 덕분에 데마시아인들은 용기를 얻었고 적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석상이 다량의 마력에 노출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데마시아군은 푸른 송곳니 산맥에서 '비전 주먹'이라고 알려진 전투마법사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려 13일 동안이나 데마시아군을 향해 강력하고 초자연적인 마법 화살을 퍼부었다. 마법 공격에서 살아남은 데마시아군 병사들은 사기가 꺾인 채 갈리오 주위로 몰려들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할 때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울림이 계곡을 천천히 뒤흔들었다. 마치 두 개의 산맥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뒤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우자 데마시아군 병사들은 죽음을 예감했다.

순간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마시아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뒤에 서 있던 거석상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흡수한 마법이 축적되어 갈리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갈리오는 데마시아군 앞에 우뚝 서서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마법 화살 공격을 연이어 흡수해 막아냈다.

그리고 갈리오는 몸을 돌리더니, 산비탈로 뛰어올라 비전 주먹 마법사들을 남김없이 격파했다.

데마시아군은 환호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해준 페트리사이트 석상에 감사의 뜻을 표하려던 그 순간, 갈리오는 다시 석상 받침대 위로 돌아가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석상이 생명력을 얻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 기이한 이야기는 푸른 송곳니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의 입을 통해 위대한 도시에서 조용히 퍼져 나갔지만, 누구도 쉽사리 믿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의 일화는 전설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고난의 시기를 견디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었다.

누구도 믿지 못했겠지만, 거석상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목격했다. 심지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의식이 깨어있었으며, 전투의 희열을 다시 맛보고 싶어 했다.

오랫동안 갈리오는 자신의 발밑에서 경의를 표하는 인간들을 지켜봤다. 인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다. 갈리오는 의아했다. 사라진 인간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투를 마친 뒤에 자신이 그러하듯이 인간들도 수리를 받으러 가는 것일까?

얼마 후 갈리오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데마시아의 인간들은 자신과 다르게 도장을 새로이 하거나 쉽게 고쳐질 수 없다는 슬픈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연약한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갈리오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동안 갈리오의 피를 끓게 만든 건 전투의 희열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전투에 데마시아인의 보호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하지만 이후 수백 년간 갈리오가 참전한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옛날처럼 마법사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데마시아도 내치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페트리사이트 거석상은 흐릿한 백일몽에 잠긴 채 세상을 바라봤다. 강력한 마법의 힘을 받아 다시는 잠들지 않아도 될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되어야만 영원토록 데마시아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깨어난 영웅 존 오브라이언 단편소설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갈리오는 데마시아 군인들의 전쟁 준비를 지켜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의 힘을 느낀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출정은 여러 번 했지만 한 번 더 생명력을 느낄 기회는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몸이 굳어 있을 때도 그의 마음은 항상 요동쳤다.

전투의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갈리오는 그저 저 멀리에서 북방의 야만인 무리가 어수선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데마시아 군대와의 일전을 위해 울레줄레 행진하는 군인들은 꿈처럼 흐릿한 감각으로 보기에도 오합지졸이었다. 갈리오는 프렐요드의 야만인들이 최근 점령지에서 저지른 만행을 수차례 들었다. 불안에 떠는 데마시아 사람들은 프렐요드인들은 누구도 살려두는 법이 없고 적의 머리를 베어 기이한 짐승들의 상아 위에 산처럼 쌓아 놓는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갈리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더 큰 대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뒤로 선 언덕만큼이나 거대한 어떤 것. 풀려나길 기다리며 성난 파도처럼 온몸을 들썩이는 요란한 움직임이 심히 기괴했다.

저게 대체 뭐지? 갈리오는 약간 들뜬 기분이었다. 저게 뭐든 간에 한 판 싸울 수 있으면 좋겠군.

그의 발아래로 완벽한 정렬을 유지한 데마시아 군인들이 승리를 다짐하는 구호를 외치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군가는 서로에게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들렸지만 이미 많은 군가를 들어 온 갈리오에게는 확신 없는 망설임으로 느껴졌다.

우리 군인들은 저 거대한 짐승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내가 대신 싸워줄 수 있다면!

갈리오는 데마시아의 모든 군인을 그의 튼튼한 팔로 안아 올려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을 거라고. 그가 나가 모든 적을 국경 밖으로 쫓아낼 거라고. 그러나 그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팔, 다리, 발톱, 모두 그의 모태인 돌처럼 차갑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움직이게 해 줄 기폭제가 필요했다. 눈 뜬 채 꾸는 꿈에서 그를 깨워 줄 강력한 마법이 필요했다.

이번엔 마법사가 있으면 좋겠군. 보통은 없지. 마법사가 없는 전투는 별로인데. 갈리오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를 끄는 소들이 탈진한 듯 콧김을 뿜어내자 그의 우려는 점점 커졌다. 모두 수십 마리나 되는 소들이 1마일마다 교대로 그를 끌고 있었다. 잠깐 동안 갈리오는 인간들이 싸움을 즐기는 사이 소가 모두 쓰러져 데마시아 외곽의 숲속에 혼자 남겨지는 상상을 했다.

그 때 마침내 그를 실은 수레가 전장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그는 프렐요드의 야만인들이 절대 물러서지도, 협상하지도 않을 것임을 알았다. 갈리오는 조그마한 군인들이 서로의 방패를 걸어 단단한 강철 보호벽을 만드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저 야만인들이 데려온 정체 모를 짐승이 데마시아 군인들이 촘촘히 짠 무기를 단숨에 깔아뭉갤 것이 분명했다.

두 진영이 무기를 높이 들고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 도끼가 내리찍고 방패가 막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서로의 적을 베어 진창 속으로 처박았다. 갈리오가 익히 알던 씩씩한 목소리들이 엄마를 부르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거대한 석상의 여린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부신 보랏빛 충격파가 전장을 휩쓸었고 많은 데마시아 군인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갈리오는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익숙한 감각을. 차가운 석고상을 녹이는 따뜻한 정오의 햇살 같은 그 느낌을.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섬광이 한 번 더 번쩍이더니 더 많은 데마시아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다시 생기를 얻은 갈리오의 감각은 놀랄 만큼 예민하게 반응했고 덕분에 무섭고 끔찍한 전투의 참상이 낱낱이 보였다. 찌그러진 갑옷 속 인간의 육신은 기괴한 모습으로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많은 야만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전열 뒤쪽에서 비열한 마법사가 다음 공격을 위해 마법의 구체를 굴리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거기 있었군. 네놈 덕분에 내가 깨어났어. 네놈을 먼저 없애주지! 갈리오는 처음엔 고마움을, 그다음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시 전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괴물 같은 형상에게 쏠렸다. 이제야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두껍고 덥수룩한 털로 덮인 거대한 짐승. 그것은 강철 사슬에 묶인 채 몸부림치며 눈을 가린 커다란 두건을 떼어내려 머리를 맹렬히 흔들어대고 있었다.

갈리오는 씨익 웃었다. 내 주먹을 상대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눈을 덮고 있던 가리개를 걷어내자 번들거리는 까만 눈 아래 으르렁거리는 납작한 주둥이가 드러났다. 앞을 보게 된 짐승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거라고 선언하듯 무시무시한 포효를 내뱉었다. 조련사가 사슬을 풀자 커다란 짐승은 데마시안 보병들을 향해 달려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열 명이 넘는 데마시안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갈리오는 충격에 휩싸였다. 쓰러진 군인들은 조그만 아이였을 때부터 그가 지켜온 이들이었다. 갈리오는 인간들이 애도하고 슬퍼하듯 그들을 위해 울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해야 한다. 그의 존재 이유는 애도가 아니다. 갈리오는 자신의 목표와 애타게 기다려온 싸움이 줄 스릴에 집중했다. 저 거대하고 역겨운 짐승에게 한 방 날리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생명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놀라운 생기의 감각은 그의 팔과 머리를 지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백 년 만에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처음 듣는 소리가 계곡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바로 석상 거인의 웃음소리였다.

전장으로 뛰어든 갈리오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적의 공성 무기들을 한 방에 저 멀리 날려버렸다. 최전방을 향해 돌진하며 길을 막는 건 모두 박살 내는 거인의 모습에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모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다. 갈리오는 군인들이 싸우는 아수라장을 벗어나 광분해 날뛰는 괴물에게 달려갔다. “반가워, 큰 짐승” 깊게 울리는 소리로 그가 말했다. “내가 널 박살 내도 되겠지?”

괴물은 마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커다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울부짖었다. 두 거인은 땅이 흔들릴 정도로 맹렬히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짐승은 어깨로 갈리오의 복부를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곧 쇄골을 움켜잡은 채 땅으로 쓰러져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갈리오는 바닥에 뻗은 상대를 밟고 섰으나 벌써 놈의 숨을 끊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자, 너무 기분 나빠 하진 말고. 시도는 좋았어. 이제 한 번 더 날 쳐봐.” 간절한 손짓과 함께 갈리오가 말했다.

천천히 일어난 짐승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짐승은 모든 힘을 그러모아 갈리오를 쳤지만 발톱으로 갈리오의 머리 부분을 할퀴는데 그쳤다.

“내 왕관을 깨뜨렸군." 갈리오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들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갈리오는 주먹을 곤봉처럼 흔들며 온 힘을 실어 짐승을 향해 날렸다. 페트리사이트로 만들어진 주먹이 짐승의 살에 부딪히자 짐승의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짐승은 눈을 감은 채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갈리오는 짐승의 척추를 부러뜨리려 거대한 돌덩어리 팔로 짐승의 허리께를 잡고 몸통을 비틀었다. 하지만 짐승은 몸을 구부리며 갈리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주위를 빙빙 돌며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기다려! 우리 싸움의 끝은 봐야지” 갈리오가 고함쳤다. 그는 짐승이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며 놈을 쫓아 육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때, 멀리서 데마시아 형제들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갈리오는 수백 피트나 짐승을 쫓아가는 바람에 어느새 전장에서 멀어져 있었다. 짐승과 싸움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데마시아 군에겐 그가 필요했다.

갈리오는 아쉬움을 담은 눈빛으로 커다란 짐승이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큰 짐승.”

몸을 돌린 갈리오는 쏜살같이 전우들에게 달려갔다. 절반도 넘는 군인들이 바닥에 쓰러져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갈리오는 즉시 그 힘의 정체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과 같은 것임을 알았다.

갈리오는 사악한 마법사를 처리하러 가기 전, 군인들의 얼굴에 어린 공포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할 일과 그것이 불러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높이 뛰어 올라 마법사에게 돌진해 그의 주문을 멈추고 놈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남은 적들은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이리저리 도망갔다.

마법의 힘이 사라지면서 갈리오의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오갔다.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생명의 힘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도 언제 끝날지 모를 잠 속으로 다시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생명의 힘은 왜 자신에게만 없는 걸까? 어째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걸까? 그의 창조주가 의도한 결과일까? 온몸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어둠의 포옹이 그를 다시 덮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비록 짧은 경험이었지만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것이며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이 깨달음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지킬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그의 단단한 주먹으로 세계의 모든 마법사를 없애버리는 날까지. 그래서 데마시아의 석상 파수꾼이 더 이상 깨어날 필요가 없을 때까지.

 

 


배경이야기 그레이브즈 무법자

 

말콤 그레이브즈는 어린 시절 빌지워터 부둣가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자라며 싸움과 도둑질 등 훗날 유용하게 써먹게 될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웠다. 그리고 매일 밤 정박하는 밀수꾼의 보트에서 물건을 나르며 돈을 벌었다. 부두에서 활동하는 범죄 조직에 고용되어 힘쓰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그레이브즈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시시했다. 결국 소년티를 겨우 벗자마자 그레이브즈는 총 한 자루를 슬쩍해 슈리마 본토로 향하는 배에 몰래 몸을 실었다. 그리고 도둑질과 사기, 도박을 하며 연안 지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큰돈이 걸린 머드타운의 불법 도박판에서 한 남자를 만난 후 그레이브즈의 인생 궤도는 크게 바뀌었다. 오늘날 트위스티드 페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기꾼이었다.

무모하리만큼 위험과 모험을 즐기는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고, 한패가 되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레이브즈의 힘과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교묘한 말솜씨는 기가 막힌 궁합을 자랑했다. 시간이 가면서 서로를 신뢰하게 된 두 무뢰한은 부자들을 등쳐먹고 어리숙한 자들을 골려 먹었다. 또한 엄선해서 뽑은 부하들과 함께 여러 건수를 올리고, 기회가 날 때마다 경쟁자들을 팔아넘겼다.

가끔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돈을 전부 날려 먹기는 했지만, 그레이브즈는 곧 다가올 모험에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발로란 남부의 국경 지대에서 납치된 상속자를 구출한다는 구실로 두 녹서스 명문가를 이간질했다. 그리고 보상금만 챙기고 상속자를 팔아넘겨 버렸다. 필트오버에서는 난공불락의 태엽장치 금고를 유일하게 뚫은 도둑들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금고의 보물을 모두 털었을 뿐만 아니라, 경비대원을 꾀어 훔친 화물선에 싣도록 한 다음 태양 관문을 통해 도망쳤다.

범행이 발각될 때쯤이면 둘은 멀리 달아난 뒤였고, 현장에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카드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들의 운도 거기까지였을까?

크게 한탕을 하려다 그만 일이 꼬여 버렸고, 그레이브즈는 현지 집행관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와중에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악명 높은 범죄자 수용소에 갇힌 그레이브즈는 수년간 독방에 갇힌 채 고문당했고, 옛 동료를 향한 원한은 점점 깊어져 갔다. 정신력이 약했다면 그대로 무너졌겠지만, 말콤 그레이브즈는 달랐다. 복수심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그레이브즈는 교도소장의 산탄총을 어깨에 메고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하던 끝에 그는 고향인 빌지워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현상금이 걸린 채 쫓기고 있었다. 현상금을 타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추격을 계속한 그레이브즈는 결국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마주했지만, 해적왕 갱플랭크가 다른 해적선들과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두 사람은 옛 원한을 접어 두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그렇게 또 한 번, 그레이브즈는 고향에서 도망쳤다. 다만 이번에는 옛 친구와 함께였다. 두 사람 모두 수년 전 헤어졌던 동료와 재회하게 되어 기뻤지만, 그레이브즈 마음속의 앙금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믿음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그레이브즈는 여전히 빌지워터를 그리워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최후의 한탕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단편소설 - 마지막 한 발

 

 

텅 빈 술집, 부서진 탁자에 기대선 말콤 그레이브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창 밖에서 현상금 사냥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좀 해. 술 맛 떨어지잖아.”

그레이브즈는 술병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데마시아 와인? 정말 이것뿐인가?”

온 사방이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 투성이였다. 간신히 몸을 숨긴 주인장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저희 집에서 제일 비싼 술이라굽쇼.”

“그래, 그래. 남은 술이 그거밖에 없겠지.” 그레이브즈는 박살 난 술병들을 내려다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이 벌벌 떠는 게 당연했다. 여기는 매일 혈투가 벌어지는 빌지워터가 아니니까. 필트오버는 그레이브즈가 태어난 빌지워터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그레이브즈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깨물어 바닥에 뱉고 병나발을 불었다. 그러더니 부자들이 하던 것처럼 와인 냄새를 맡고 술을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오줌 맛이네. 뭐 공짜 술에 이렇다저렇다 할 수 없겠지만? 안 그래?”

부서진 창문 너머로 짐짓 허세를 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포기하시지. 우린 일곱이고 너는 혼자야.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

그레이브즈는 피식 웃으며 받아 쳤다. “당연하지. 좋게 끝나길 기대했나? 그럼 친구들을 더 모아보라고!”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일하러 갈 시간이네.” 특수 제작된 산탄총을 긴 탁자에서 집어 들며 그레이브즈가 말했다. 새 탄환이 장전되는 위협적인 딸각 소리는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한 번이라도 그레이브즈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이 소리를 모를 수 없다. 파멸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

그레이브즈는 미끄러지듯 문 쪽을 향해 다가갔다. 유리조각이 장화 굽 아래 경쾌하게 부서졌다. 그는 몸을 굽히고 깨진 창문 너머를 흘끗 쳐다봤다. 네 명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선술집 안쪽으로 석궁과 소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둘은 작업장이 있는 이층에, 둘은 그늘진 문간이었다.

아까의 새된 목소리가 외쳤다. “지옥 끝에서부터 너를 쫓아 왔다고. 이 망할 자식아! 수배지에 생포하란 얘긴 없었어. 더 피 흘리기 싫으면 총이 보이게 손들고 걸어 나와.”

그레이브즈가 답했다. “나갈 거라고. 걱정 붙들어 매라니까.”

그리고는 바다뱀 은화 한 닢을 휙 던졌다. 동전은 럼주가 쏟아진 탁자 위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앞면을 위로하고 멈췄다. 주인장이 바들바들 떨며 겨우 손을 내밀어 동전을 집어 들었다.

“문 값이야. 잘 챙겨놔.” 그레이브즈는 씩 웃었다.

“문이라굽쇼?” 주인장이 울먹이며 되물었다.

커다란 장화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술집 앞문의 경첩을 부수어버렸다. 그레이브즈는 총알을 난사하며 박살 난 문 사이로 돌진했다. 텅 빈 필트오버의 거리로 경쾌하고 무시무시한 빛의 그림자가 날아오를 듯 어른거렸다.

“좋다, 이놈들아! 두 눈 크게 뜨고 어떻게 끝나는지 지켜봐라!”

 

 


그라가스 배경이야기 술취한 난동꾼

그라가스는 난동꾼으로 유명하다. 적, 아군 가릴 것 없이 일단 화가 나면 무엇이든 깨부수고 보기 때문이다. 설사 그의 괴팍한 성격을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가 담근 술을 마셨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라가스가 술보다 좋아하는 게 있기는 할까? 일단 그가 싸움보다 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얼마나 사랑하면 단순히 마시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가 손수 빚기까지 하겠는가? 주조가로서 그의 철학은 일단 무조건 더 독하고, 센 술을 빚어보겠다는 것. 이 사내는 이제껏 저 자신이 만족할 만큼 취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육중한 체구 덕분에 아무리 마셔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술이면 일단 마시고 보는 그에게 있어서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되곤 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밤, 술집에 있는 술통이란 술통은 죄다 비우고도 성이 차질 않던 그에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럴 바에야 내가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취할 수 있는 술을 만들어 보자! 궁극의 술을 위한 그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티 없이 맑은 빙하수를 구하러 다니던 그라가스는 프렐요드의 인적 없는 황량한 빙하지대에 이르렀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거대하고 깊은 빙하의 틈,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는 바로 그곳에서 불가능할 정도로 투명한 얼음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 녹지 않으며 표면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신기한 얼음 조각은 그라가스의 맥주에 독특한 풍미를 더해주었으며 언제나 마시기 딱 좋게 시원한 온도를 유지해주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그라가스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새로 개발한 음료를 다른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고 가까운 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역사적 사건이나 운명적 만남은 꼭 이렇게 우연 속에서 이루어지나 보다. 그날 그 시각, 프렐요드의 애쉬는 두 부족의 전사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맹 여부를 질질 끌고 있었기에 애쉬는 속이 다 타들어 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술기운으로 정신이 다소 혼미했던 그라가스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고, 비틀거리며 전사들의 몸에 부딪혔다. 전사들은 웬 주정꾼이냐면서 욕설을 퍼부었는데, 그걸 그라가스가 가만히 듣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욕설에 박치기로 회답했고 곧이어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누가 알았으랴? 이 싸움판이 프렐요드의 전설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될 줄을! 쓰러진 전사들이 깨어났고, 애쉬는 싸움은 이제 그만두고 대신 친선의 술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하마터면 전쟁을 치를 뻔했던 두 부족의 갈등은 그라가스의 술과 함께 눈 녹듯 해소되었고, 부족들은 이내 화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분쟁을 막고 영웅으로까지 칭송받은 그지만 아직도 술에 취해 보겠다는 꿈만은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그라가스는 룬테라 최고의 술 재료를 찾기 위해 얼어붙은 북쪽 땅으로 탐험을 떠났다.

 


야만전사 왕 트린다미어 배경이야기

 

트린다미어의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혹독한 생존의 투쟁이었다. 영원히 녹지 않는 동토에 자리 잡은 트린다미어의 부족은 세 자매를 비롯하여 프렐요드의 고대 신들을 섬겼지만, 주로 불사의 상아 군주, 즉 툰드라를 파괴한다고 알려진 정령 신을 섬겼다. 이들은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갑옷 대신 대검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엄니를 본떠 만든 무기였다.

트린다미어 부족의 엄청난 지구력과 결투 실력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다른 부족의 습격을 막아내고 설산의 괴수들을 물리쳤으며, 남쪽에서 침략해오는 녹서스군도 격파했다. 이러한 부족에서 용맹한 전사로 성장하고 있던 트린다미어는 유별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동쪽에서 불어온 거센 눈보라가 밤하늘을 뒤덮었던 그 날, 머리에 뿔이 난 거대한 형체가 보름달을 등진 채 나타났다.

부족이 모시던 멧돼지 신이 강림했다고 생각했던 몇몇 사람들은 무릎을 꿇었다. 괴수의 몸에서는 고대 마법의 힘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은 프렐요드의 마법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었던 부족민들은 그날 밤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다.

트린다미어는 겁에 질린 채 괴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잔혹하게 칼을 휘두르는 괴수의 모습을 보고 가슴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피에 굶주려서였는지, 아니면 광기에 사로잡혀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트린다미어는 자신의 대검을 집어 들고 괴수를 향해 포효했다.

어둠의 존재에 맞선 트린다미어는 마치 파리처럼 나가떨어졌다.

피에 젖은 눈 속으로 쓰러진 트린다미어 주위에는 부족민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죽기 전 마지막 숨을 내쉬던 트린다미어 곁으로 괴수가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말했다. 트린다미어는 집중하려고 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오는 고대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괴수의 웃음소리는 젊은 전사의 뇌리에 영원히 새겨졌다.

트린다미어는 살아남았다.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분노가 그의 몸을 다시 일으켰다. 트린다미어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봤다. 부족민들을 잃고 전사로서 자존심까지 짓밟힌 트린다미어는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트린다미어에게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살아남은 부족민들을 받아줄 다른 부족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남쪽으로는 녹서스가, 북쪽에는 서리방패 부족이, 동쪽에는 어둠의 존재가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서쪽에는 아바로사의 현신이라는 자가 다른 부족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했다. 한때 트린다미어는 그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 트린다미어에겐 서쪽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트린다미어와 생존자들은 계곡에 도착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젊은 전사는 아바로사 부족 지도자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받아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부족민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자신도 복수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트린다미어는 엄니 모양의 대검을 휘두르며 다른 부족의 전사들과 결투를 벌였다. 어둠의 존재와 그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결투를 이어가던 트린다미어는 곧 최강의 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바로사인들은 트린다미어가 내뿜는 기이한 분노에 불안해했다. 북방의 전사들도 결투를 마친 트린다미어의 상처가 너무 빨리 아무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다. 트린다미어의 생명력은 지금껏 봐 왔던 냉기의 화신들과도 달랐다. 그가 분노에 몸을 맡길수록 상처는 더 빠르게 치유됐다. 사람들은 트린다미어의 부족이 괴이한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했고, 타 부족의 인정을 받아 부족민을 지키려던 트린다미어의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하지만 모두가 트린다미어에게 등을 돌리진 않았다. 아바로사 부족의 지도자였던 애쉬는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생각이었다. 애쉬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자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굴복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애쉬는 훤칠하게 생긴 야만전사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과 피의 서약을 맺으면 부족민들을 아바로사 부족에 받아주겠노라고 트린다미어에게 제안했다.

애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트린다미어는 애쉬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애쉬는 진정 아바로사의 현신이었다. 트린다미어의 분노도 애쉬의 지도력 앞에 안정을 찾았고, 둘 사이에서는 사랑이 싹텄다.

트린다미어는 애쉬의 투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앞날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야만전사의 왕은 프렐요드 땅에 감도는 전운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부족의 원수도 갚지 못한 상태에서 여왕의 곁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숙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잃어버린 고리 나르 

배경이야기

 

 

얼음이 프렐요드에 그 이름을 붙여주기 전, 그곳에는 경이로 가득한 땅이 존재했다. 한때 나르의 눈에 비친 세상이었다.

활기 넘치는 어린 요들 나르와 나르의 종족은 북쪽 땅의 강인한 부족들과 뒤섞여 살아갔다. 나르는 눈에 발자국이 겨우 남을 정도로 작았지만, 성질은 자신보다 열 배는 더 큰 짐승들과 맞먹을 정도라 뭔가 잘못되면 욕을 내뱉으며 폭발하고는 했다. 이 때문에 나르는 필멸자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지혜로운 거대 생명체들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다. 나르에게 그들은 흰색 털이 난 덩치 큰 요들처럼 보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부족민들이 식량을 찾아 툰드라를 뒤지며 야생 열매와 맛있는 이끼를 모을 때, 나르는 좀 더 본질적인 전리품을 수집해나갔다. 돌이나 자갈, 죽은 새의 지저분한 잔해 같은 것들이었다. 나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은 드류바스크의 턱뼈였다. 턱뼈를 차가운 땅에서 끄집어낸 순간, 나르는 신이 나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턱뼈를 멀리 내던졌다.

턱뼈는 두어 걸음 먼 곳에 떨어졌다.

처음 만끽하는 성공에 신난 나르는 자신의 '부메랑'을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세상에는 반짝이는 보푸라기, 달콤한 꿀, 동그란 물건처럼 나르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줄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아끼는 무기를 던졌다가 받을 때만큼 순수한 기쁨을 선사하는 물건은 없었다. 나르는 이제 자신을 사냥꾼이라고 여기며 작은 요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야생 짐승 떼를 뒤쫓아 다녔다.

하지만 그런 나르조차 북쪽 땅에 다가오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늘은 더욱 어두워진 것 같았고, 바람은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한때 함께 식량을 찾던 필멸자 부족들은 이제 서로를 사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얗고 덩치가 큰 요들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으로 생각한 나르는 그들에게 향했다.

나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냥 기술을 동원해 그들의 흔적을 따라 광활한 산맥의 눈 덮인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이렇게까지 멀리 온 것은 처음이었다. 몰래 다가가자 셀 수 없이 많은 필멸자들이 보였다.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중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땅이 흔들리더니 갈라졌다. 나르는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성질을 내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필멸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덩치 큰 요들들은 포효했다.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자 침묵만이 남았다.

심연이 열리고 그곳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은 거대한 뿔을 달고 촉수를 휘둘렀다. 기이한 빛으로 타오르는 외눈은 나르의 등털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몇몇 필멸자들이 달아났고 나르의 가슴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부메랑을 잃어버리거나, 다시는 포옹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끔찍한 괴물이 자신의 새로운 친구들을 해치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화가 난 나르는 그 순간 진심으로 분노했다.

나르의 눈에는 괴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나르는 괴물을 향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한쪽 발에는 눈덩이를 쥔 채였다… 적어도 나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눈덩이가 아닌 산비탈에서 뜯어낸 바위였다. 나르가 거대하고 하얀 요들만큼 커진 것이다. 나르는 괴물의 얼굴을 세게 쳐서 괴물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나르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 어떤 겨울보다도 차갑고 매서운 한기가 나르를 덮쳤다. 공기조차 얼어 버릴 듯했다. 이 원소 마법은 나르의 텁수룩한 털 속을 날카롭게 파고들며 나르를 그 자리에서 얼려 버렸다. 괴물은 물론 모든 것이 침묵에 빠졌다. 나르의 힘과 분노 역시 모두 녹아 사라졌다. 팔다리에 깊은 피로가 몰려들자 나르는 조용히 잠에 빠졌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 마침내 깨어난 나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깨에서 서리를 털어 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맞서 싸울 괴물도, 지켜야 할 친구도 없게 되자 나르는 다시 아주 작고 외로운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르의 커다란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옆에 소중한 부메랑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 나르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종종걸음으로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아직까지 나르는 그 운명의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어떻게 빠져나온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저 수집할 만한 물건과 탐험할 장소가 가득한 눈앞의 세상에 감탄할 뿐이다.

 

 

 

 

단편소설

사냥당한 사냥꾼

 

정글은 어리석은 것들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지. 부러진 가지 하나쯤이야, 하고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만사태평인 놈들.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주의한 녀석들 말이야.

이 정글은 이미 나한테 접수된 지 오래. 시시한 사냥감들 덕분에 한적하고 지루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래, 내가 놈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야. 그 커다란 발자국을 통해 녀석의 발톱을 처음 만났지. 필시 언월도처럼 육중하고 날카로울 거야. 거기 걸리면, 사람 따윈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흥미로운 사냥감이 등장한 걸까?

나는 즉시 그놈의 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놈이 지나간 자리마다 충격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거목들, 영겁의 시간 동안 굳건히 서서 이 땅을 수호했던 나무들이 어지러이 쪼개져 있었다. 조잡한 도끼를 든 멍청한 놈들이긴 했지만 수많은 인간이 이 거목을 베겠다고 찾아와서는 나무 밑동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토록 단단한 거목들을 가느다란 나뭇가지인 양 짓밟고 지나가다니. 도대체 넌 누구냐?

그놈의 흔적은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끊기기 일쑤였다. 지나다닌 곳마다 이렇게 처참한 꼴을 만들어놓고 갑자기 증발한 것 마냥 흔적이 끊기다니. 폭풍같이 휘몰아치다 이슬처럼 사라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아! 내가 곧 놈을 마주하리라!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전리품이 되리라!

상상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무들이 죄다 쓰러져서 생긴 텅 빈 공터에서 시냇물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났다. 조금 걸었더니 냇가에 다다랐고 거기서 작고 복슬복슬한 주황색 털 뭉치를 발견했다. 녀석은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잠자코 그 자그마한 생명체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작은 물고기 하나가 수면 밖으로 튀어 오르자, 거의 동시에 그 털 뭉치 녀석이 물살을 향해 뛰어들었다. 저 녀석 요들이었어? 꽤 재빠르잖아? 게다가 나름 사냥꾼이라니!

 

아주 좋은 징조야. 그놈을 곧 찾을 수 있겠군. 놈은 이미 내 손아귀에 든 쥐다.

그런데 이상했다. 냇가로 올라온 고 요들 녀석이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큰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손에는 뼈로 만든 부메랑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네 다리를 이용해 내 앞으로 달려와서는 뭐라고 자꾸 쫑알대기 시작했다. 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있어라, 나는 사냥감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어린 요들에게서 발길을 돌린 나는 장애물처럼 높은 바위를 훌쩍 뛰어넘어 사냥감의 흔적을 계속해서 추적해 나갔다. 놈의 냄새를 포착하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하자. 눈을 감고 킁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쉽게도 범인은 아까 그 요들 녀석.

이 꼬마가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걸까? 모르겠다. 어쨌든 사냥에 방해만 될 뿐이야. 나는 녀석과 눈을 맞춘 뒤에 손가락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계속 저쪽으로 가라는데도 자꾸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구나. 혹시 못 알아듣는 건가? 강하게 나가야겠군.

한 걸음 물러서서 포효를 내지르자 요들 녀석의 털이 마구 나부끼고 발 아래의 땅이 우르르 쾅쾅 울렸다. 얼마 후, 녀석이 고개를 돌리더니 작은 미소 같은 걸 지으면서 내 앞에 부메랑을 들어 보였다.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어. 난 녀석의 부메랑을 낚아채서, 저 앞에 보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던져버렸다. 부메랑은 나무의 몸통에 깊이 꽂혔고, 녀석은 곧바로 부메랑을 쫓아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열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울려 퍼지는 거친 포효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사방에서 바위와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눈앞에서 거대한 나무 하나가 쓰러지며 내 앞길을 막았다. 나무 몸통에 꽂혀 있는 건 요들 녀석의 부메랑.

등 뒤에선 섬뜩한 으르렁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야말로 어리석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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